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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농부의 마지막 일기

靑 波 2024. 10. 22. 00:56

늙은 농부의 마지막 일기

일평생 땅만 파 먹고 사신 농부가 있었다. 삽자루를 들고 논으로 가면 바람을 가르는 재비들 
사이에서 하루를 보냈고,호미를 들고 밭에 나가면 간밤에 파 놓은 두더지굴 바뚜버리에 들쥐 가족
뽕나무에 걸쳐진 새박이 그런 땅에 이랑을 치고 씨앗뿌리고,해마다 숨이 칵칵 막히는 7-8월 땡볕
에는 목줄을 타고 내리는 소금덩어리가 서너 말은 넘었다.

그렇게 땅만 파먹고 뼈가 녹도록 일하여 9남매를 키워 객지로 내 보내고 살만하니,덜컥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뜨시고 홀로 고향에서 살다 나이가 80을 넘기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더 이상 농사도 
못 지을 정도로 노쇠해져가도 9남매 중 아무도 "아부지요, 이제 농사 일 그만 하세요."라고 위로
하는 자식이 없다가,그늠의 정치 꾼들이 경북 도청을 이전한다며 20년 넘게 떠들었는데 그 때마다
도청이 구미로 간다니,영천으로 간다니~ 하다가 영배미 골넘어 양배미로 결정이 나고 난 이후 여
기저기 "땅 매입합니다." 라고 하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땅도 좋치 아니하던 산 아래 천수답 김 노 
인 땅도 덩달아 올랐다.

부동산 업자는 김노인 산아래 땅은 절대농지도 아니고 잡종지이고 도청이전 예정지로부터 불과 2km 
떨어지고 산 속이라서 "모텔이나 식당하면 아주 좋은 자리" 라며 돈을 더 쳐 줄터이니 땅을 팔라
고 몇 번이고 찾아왔지만 김 노인은"문전옥답을 우째 파닛껴. 안파니더" 고개를 저었다.
평당 3만원에도 팔리지 아니하던 땅이 읍내에 20개도 넘는 부동산 사무실이 들어서고나서 십만원
이 훌쩍 넘어서자 영배미 마실에도 도시 자가용 차 들이 들락거리고,객지 자식들도 갑자기 양철영
감 뽕밭뚜버리에 땡벌집에 벌 들락 거리듯이 자주 고향 부모님들을 찾았다.

한마디로 孝女孝子 家家在라 갑자기 영배미 마실에도 도시 효자들이 득실 거렸다.
자연 한두 집 늙은 농부들은 평생 땅만 파고 살던 고향집을 정리하고 며느리 성화? 에 못 이기는
척 대구로도 가고 인천으로도 떠나 갔다.
김 노인도 그리 내키지 아니하지만, 유독 맏며느리가 땅을 정리하고,서울 올라오시면 남은 여생을
더운 물이 콸콸 나오는 아파트에서 편하게 지내시게 해 준다며 사정 사정 하여 결국 조상이 물려
준 문전 옥답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첫째 아들도 둘째 아들도 셋째 아들도 "한 일억씩만 도와주시면 이참에 30평짜리 아파트를 팔고
40평으로 늘리게습니더."하면서 늙은 아비에게 보챘다. 허긴 땅이 오르고 벌써 몇 집이 형제간에
싸움도 벌어지고 심지어 미국 이민갔던 아들도 돌아와서는 자기 몫을 요구하는 집도 있었다.
김노인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이러다간 자신이 죽고나서 자식들이 땅 싸움에 휘말려 자신의 묘 앞
에 술 따라야 할 제삿 날에는 어느 집 형제들이 따로 따로 올 것 같은 걱정도 앞섰기 때문이다.

결국 땅을 정리하고 서울 맏 아들 집으로 가기로 했다. 땅 판 돈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는 날
서울서 제법 잘사는 둘째 며느리와 자신을 모시겠다는 맏 며느리 사이에 결국 설전이 오가고 
부산 아파트 앞에서 채소 장사하면서 어렵게 사는 딸은 눈물 찔끔 거리면서 떠났다.
폭삭 늙은 농부가 서울로 떠날 준비를 할 즈음,이미 반년 전에 땅을 팔고 일산에 사는 아들 집에
갔던 논실댁이 도로 시골로 내려 왔는데 돈은 자식들에게 다 빼앗끼고 고향에서 기거 할 방이 없
어서 본동네는 살지 못하고 절뒤 마을 빈집에 들어 갔다는 이야기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마을 늙은 친구들 배웅을 받으면서 눈물을 비치며 고향을 떠 났던 김노인이 무슨 연유인지 3개월
만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 오셨다. 달랑 옷 보따리 하나만 들고 읍내 버스 정류장에 내린 김노인은
대낮에는 고향 마실로 들어서기 너무 부끄러워 읍내 뒷쪽 천방 뚝 아래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캄
한 밤이 되어서야 고향 마을로 돌아와서 석달 전 버리고 간 고향 빈집으로 더듬더듬 다시 들어가
셨는데 간간히 꺼이꺼이 낮은 헛 기침 소리가 새벽이 다 되도록 들리셨다.

마을에 늙은 할매들이 그런 김노인에게 먹을 음식을 갖다 주었지만 당체 입에 넣치 아니하시고 도
로 밀어 내시었고, 그런 중에도 9홉명의 자식들은 단 한 명도 찾아 오지 않았다. 
고향 빈집에서 며칠 밤을 보낸 다음 날 풍산 장날이 서던 날이다. 김 노인은 새벽에 일어나 마당 
우물 물을 가마솥에 부어서 펄펄 끓인 후, 자신이 오랜 세월,소 키웟던 마굿 칸에서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목욕을 마친 김노인은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 만들어 주신 깨끗한 한복을 갈아입으시고
다시 고향 집을 나섰다.

마침 느티나무 아래서 당파 씨를 고르던 이웃집 시울실 할매와 구담댁 할매가 뽀오얀 한복을 입고 
나서는 김 노인을 보시고는 "저 어르신 아침부터 옷을 말끔하게 갈아입고 어디가시노?"
서울서 돌아와 내두록 식음 전페하시고 누워계시더니 오늘은 풍산 장에게 가실 모양있씨더.
"서울 잘 사는 아들한데 호강하러 가신분이 저렇게 돌아와서 당췌 말도 안하니시 맴이 아프이더."
"어제 아침에 죽을 끓여서 갖다드렸는데 한 숟가락도 안 먹었띠더. 당뇨도 더 심하고~이제 허리 
병도 도져서 걸음도 잘 못 걸을 실 것 같다하더니 읍내 약 사러 가는 모양있시더!"

"빈집에 전기도 없어 우짜닛껴!" "전기는 어제 동장 말로는 다음 주에 불 키도록 한전에서다시 
전기 넣어 준다카디더만~ 남의 못타리씨더." 당파 씨에 묻은 흙먼지를 털털 털면서 구담댁 할매가
"그 많튼 문전옥답 다 팔아 자식들 한데 다 떼이뿌고~ 늙으막에 남의 일 같지 안니더."
"지가 그말있씨더~ 늘그막에 도시 며느리 꼬임에 빠져가 땅 팔아서 서울 간 영감재이들이 며느리
한테 밥도 제되로 못 얻어 걸리고 날만 새면 종로 무슨 공원인가 거기 간다카디더!"
"종로 공원? 거긴 뭐하는 곳인데~" "거가면 낮에 밥을 공짜로 주는데~ 줄서서 기다린다카디너! 
염감재이들이!" "우야노? 밥 한끼 얻어 먹을라꼬?"

"그캐도 거기 가는 영감들은 다행이라카디너. 다리가 성하지 못해 잘 걷지도 못하는 영감재이들은 
집에 종일 있기는 며느리 눈치보이니 마카 골목에 나와서 편하게 앉을 헌 의자도 없이 내두록 땅
바닥에서 퍼질러 앉아서 논다카디더!" "저런!" 
다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휴~ 하고 긴 한숨을 솥아 내시었다.
시울실 할매와 구담 할매가 걱정스러운 듯 가만가만 힘겹게 걸어가시는 김 노인 쪽을 바라보았다.

김 노인은 읍내 길로 안 가시고 참 진달래꽃이 붉게 피어 있는 마을 앞 산 정살미 쪽으로 오르
셨는데~ 힘없이 가만 가만 발걸음을 가시던 김 노인은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서 고향 집을 바라
보기도 했다. 그러시는 김 노인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할매들이 걱정스럽게 다시
"저 어르신 어디가는데~읍내로 안 가시고 앞산으로 올라 가시노?"
"할마이 묘에가시나? 정살미 산에 할마이 묘가 있잖닛껴!" "이제 와서 할마이 묘에 간들 무슨소
용있닛껴?" "오죽 가슴이 답답하면 할마이 묘이 가실닛껴? 다녀 오시면 속도 풀리실끼고 밥 숟가
락도 드실끼씨더 걱정 마소." "그카마 이따 노인정서 배차전 꿉는다카던데 한 접시 갖다 주시더"

"그래시더" 시울실 할매가 당파 뿌리를 땅에 탈탈 털면서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날 해가 어둑어둑해져도 앞산으로 오르신 할아버지는 마을로 내려오시지 않았다.
구담댁 할매가 노인정에서 배차전 한 접시하고 막걸리 반 병을 들고 저녁무렵 김노인 집을 갔지만
김노인은 집에 돌아 오지 않았다. 다들 걱정 했지만 누군가 "서울 아들집으로 다시 간 모양있씨더
는 바람에 다소 안심하였다.

그런대~ 다음 날 오후 동네 할매들이 김 노인 빈집 처마에 반쯤 비워있는 농약병을 들고는
 "우얏꼬 우앗꼬!" 탄식을 하며 눈물을 훔치셨고 읍내 형사들이 전경들을 앞세우고 앞 산 김노인
할머니 산소 쪽으로 급하게 뛰어 올라가고, 마을 어귀에는 읍내 앰불런스 한 대가 
다급하게 왱왱 거리면서 들어서고 있었다.     (경북 신 도청 이주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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