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緣起法)
연기법(緣起法)이라. 연기법은 바로 부처님 법(法)의 핵심(核心)입니다. 일체(一切)의 유위법(有爲法)은 모두 인연(因緣) 따라서 일어남을 말하며 특히 화엄종(華嚴宗)의 교리(敎理)는 연기(緣起)를 주로 하여 그 심천(深淺)에 따라 사종연기(四種緣起)를 말합니다.
* 연기법(緣起法)
1) 업감연기(業感緣起)<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 혹· 업· 고(惑業苦)의 삼도(三道)가 전전(展轉)하여 인과상속(因果相續)함을 말하며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상(相)임. 2)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 장식(藏識)으로서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삼법전전(三法展轉) 인과동시(因果同時)함을 말함.
3)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 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도 함.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眞如)는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한 실체(實體)인데 염정(染淨)의 연(緣)에 따라서 종종(種種)의 법(法)을 생(生)함을 말함. 진여문(眞如門)으로는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실체(實體)이나 생멸문(生滅門)으로는 염연(染緣)에 따라서 육도(六道)를 현(現)하고 정연(淨緣)에 따라서 사성(四聖)을 나툰다.
4) 법계연기(法界緣起) :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도 함. 법계(法界) 곧 일체만유(一切萬有)를 일대연기(一大緣起)로 보는 것. 5) 육대연기(六大緣起)…지수화풍(地水火風), 공(空), 식(識)의 육대(六大)가 우주(宇宙) 법계 (法界)에 두루 가득하여 만유제법(萬有諸法)을 연기(緣起)함을 말함.
* 이진여(二眞如) : 수연진여(隨緣眞如)와 불변진여(不變眞如)
1. 수연진여(隨緣眞如) : 자성(自性)을 불수(不守)하고 염연(染緣)에 따라 염법(染法)인 육도 사생(六道四生)을 나투고 정연(淨緣)에 따라 사성(四聖)을 나툼. 2. 불변진여(不變眞如) : 연(緣)에 따라 만차(萬差)의 제법(諸法)이 이루어지나 진여(眞如)의 자성(自性)을 잃지 않음을 말함. * 수연진여(隨緣眞如)는 파(波)와 여(如)하고 불변진여(不變眞如)는 수(水)와 같음.
불변(不變)의 수(水)가 파상(波相)을 일으키고 수연(隨緣)의 파(波)가 수성(水性)을 불실(不失)한다. 그래서 수연진여(隨緣眞如)이기 때문에 진여(眞如)가 곧 만법(萬法)이며 불변진여(不變眞如)이기 때문에 만법(萬法) 그대로 곧 진여(眞如)이다. 소승(小乘)은 아예 이종(二種)의 진여(眞如)를 모르고 대승(大乘)의 권교(權敎)는 불변진여(不變眞如)는 아나 수연진여(隨緣眞如)를 모르며 대승실교(大乘實敎)는 두 진여(眞如)를 다 안다. 기신론(起信論)은 바로 이 도리를 밝혔다.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
부처님 법은 연기법(緣起法)을 기본으로 합니다. 부처님 법은 인연법(因緣法)을 줄거리로 합니다. 논리적인 줄거리는 바로 인연 연기법입니다. 따라서 인연법을 알면 부처님 진리를 알고 인연법을 모르면 부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연기법은 저급한 차원에 머물게 되면 이것은 세간적인 하나의 상대적인 원리 그런 것밖에는 안됩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이 중요한 점은 이른바 법계연기(法界緣起)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그런 차원까지 높여져야 참다운 대승적 연기법이 됩니다. 이 시간은 주로 연기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불법(佛法)을 얘기하는 분이 연기법을 말하지 않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앞서 말씀과 같이 세간적인 차원 상대 유한적인 차원에 머물러 버립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그런 차원에서만 그쳐 버리면 사실은 우리 생활에 큰 힘이 못됩니다. 이른바 상대적인 것밖에 안됩니다. 불교 연기법은 업감연기, 아뢰야연기, 여래장연기, 육대연기, 이렇게 4종으로 구분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1. 업감연기(業感緣起)
먼저 업감연기(業感緣起)라. 업감연기는 우리가 업(業)을 짓고서, 업은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업이 되지 않겠습니까. 가사 우리가 무엇을 좋다 그러면 그냥 좋다는 것이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다 흔적(痕迹)을 둡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도 그런 것이 그만치 흔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아무튼 우리가 말 한마디를 한다든가 생각을 한 번 한다든가 행동으로 옮긴다든가, 이른바 신구의(身口意)라. 우리 몸으로 행동을 하고, 입으로 말하고, 뜻으로 생각을 하고,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업인데, 업을 지어 놓으면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꼭 흔적이 남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우리가 업을 짓고 또 업을 지어 놓으면 그 하나의 업보(業報)로 해서 고(苦)를 받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번뇌(煩惱)를 일으키고, 또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을 지어 놓으면 결과적으로 인생고(人生苦)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 전생에 지은바 그런 하나의 업보에 따라서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와 같이 과거 전생에 업을 지어서 그 업의 과보에 따라서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났고, 금생에 또 업을 지어서 거기에 상응(相應)되게끔 내생 가서 태어나고, 이것이 이른바 삼세인과법칙(三世因果法則)이라. 이것은 불교의 기초적인 법문입니다. 우리 부처님 공부를 하실 분들은 역시 삼보사제(三寶四諦)라! 부처님과 부처님 법과 부처님 법 따라서 수행하는 승(僧) 이것이 삼보 아니겠습니까. 삼보 이것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배가 삼보입니다. 천지 우주의 근본 도리, 대 자연의 도리가 부처인 것이고, 그 부처님 법을 깨달으면 또 부처인 것이고, 그래서 천지 우주의 도리 이것이 하나의 부처인 동시에 바로 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우주의 근본적인 법에 따라서 행동하면 좋은데 우리가 그렇지 못하니까 업을 짓고서 거기에 상응된 고를 받는 것입니다.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를 통해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그 업을 받는가? 번뇌(煩惱)를 일으켜서 업을 받는가? 과거 전생에도 무명(無明)이라 하는, 무명 이것은 없을 무(無)자 밝을 명(明)자, 진리를 모르는 무지(無知)가 무명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과거 전생에 무지, 무명 때문에 부모 연(緣)을 만난단 말입니다.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따르고, 무지하기 때문에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무지한 행 따라서 식(識)이 생기고, 그 업식이 중음계(中陰界)를 헤매다가 부모 연 만나서 태 가운데 잉태하고, 또 자라나 열 달이 차면 태어난단 말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보고, 듣고, 느끼고 해서 또 업을 짓는 것입니다. 업을 지어 놓으면 금생에 그것이 씨앗이 되어서 죽은 뒤에는 내생 가서 그대로 또 다시 과보(果報)를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과거, 현재, 미래가 항시 수레바퀴 모양으로 돌고 도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그래서 혹업고(惑業苦)라. 혹(惑) 이것은 미혹할 혹(惑)자, 번뇌를 가리킵니다.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 따라서 받는 결과가 고(苦)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외워 두시면 편리합니다. 내가 가사 누구를 미워한다. 그러면 그것은 혹이란 말입니다. 무엇에 탐착(貪着)을 한다. 이것도 혹입니다. 혹이 있으면 그런 번뇌에 따라서 행동이 있게 되겠지요. 그래서 업을 짓고 고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항시 이와 같이 혹업고가 되풀이 됩니다. 무지한 번뇌 때문에 행동을 하고, 그 행동 따라서 인생고(人生苦)를 받고, 혹업고의 삼도(三道)가 전전(展轉)하여 인과상속(因果相續)이라.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 항상 이것이 상속이 되어간단 말입니다.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상속되어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삽니다.
뱅뱅 도는 인생고, 그것을 뚝 끊어 버리는 것이 성자의 가르침이요, 성자의 길입니다. 우리 중생은 항시 이와 같이 죽고 나고 살고 죽고 끝도 갓도 없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돌고 도는 것입니다. 이러한 윤회의 바퀴를 번뇌에 다라서 업을 짓고 고통을 받는 인생고의 바퀴를 다 끊어 버려서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업감연기(業感緣起)라 하는 낮은 차원의 연기법으로 해서는 영생해탈이라는 그런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 행동 따라서 인생고를 받고, 이런 것만이 업감연기라 하는 차원 낮은 연기법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다. 불교에서 연기를 보는 사람은 부처님 진리법을 확실히 알고 부처님 법을 보는 사람은 부처님을 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연기법을 모르면 그때는 불법을 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연기법은 불교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연기를 안다고 할 때는 불법을 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연기를 모르면 불법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인연 따라서 일어난단 말입니다. 이 세상 만물 어느 것이나 인연 따라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일어나는 연기법으로 해서 이루어집니다. 현대말로 하면 인과율(因果律)이라. 인과율을 떠나서 과학도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이라는 것은 인과율을 공리(公理)로 합니다. 인과율이 없으면 과학은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과율보다 훨씬 더 심오한 가르침이 부처님 연기법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과학적 인과율은 단순히 원인과 결과만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사상인 연기법은 그 인(因)과 연(緣)과 과(果),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인 조건과 이것이 합해서 결과가 나온다는 보다 심오한 범위가 넓은 것입니다. 그런데 업감 연기법 정도는 우리 눈앞에서도 다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범부에 속한 연기법 이것이 업감 연기법입니다.
그러면 이 연기법의 근원은 무엇인가? 연기법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원인을 캐서 물을 때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다른 가르침이나 과학적인 가르침은 모릅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천재도 상대성(相對性)이 어디서 왔는가? 그 원인을 어떻게 풀지를 못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을 세우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결국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 참다운 본질(本質)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을 초월(超越)한 세계, 상대(相對)를 초월한 세계가 되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가 전전(展轉)하여 인과상속(因果相續)함을 말하는 것으로서 혹(惑)은 심병(心病) 즉 번뇌(煩惱)이며, 업(業)은 몸의 행위(行爲)이고 고(苦)란 생사(生死)의 과보(果報)이다. 그래서 심(心)의 병(病)을 연(緣)으로 하여 신(身)의 업(業)을 짓고 신(身)의 업(業)을 인(因)으로 하여 생사(生死)의 과(果)를 받는다.
이와 같이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가 서로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되어 돌고 도는 것을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상(相)이라 하며 과거(過去)에 거슬러 올라가면 시작이 없고 미래(未來)에 굴러갈 때 또한 끝이 없나니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은 이를 밝힌 법문(法門)이다. 그런데 이러한 삼법(三法)은 본디 무엇으로부터 나왔느냐고 물을 때는 대답할 수 없나니 그래서 업감연기(業感緣起)에 이어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가 일어나는 까닭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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