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마음의 양식/般若로가는 길

삶의 최종 목적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靑 波 2009. 8. 7. 09:54


        발원(서원)
    인간이란 의지적 동물이기 때문에 의지의 소산인 업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좋은 의지이든 나쁜 의지이든 불교 용어로 말해 선업이든 악업이든 그것이 업인 한 거기에 따른 과보는
    피할 수 없다.때문에 끝없는 윤회의 바퀴를 돌고 도는 것이다.
    물론 선한 행위를 하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행복하고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를 이룰 수 있다.그러나
    그 선 혹은 악이라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상황에따라 돌변할 수 있다.선도 일정한 한계내지
    조건 속에서의 선이기 때문에 그 조건을 벗어나면 그것은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업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의지적 동물인 인간이 어떻게 행위하면 업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떤 계산된 의도가 들어 있지 않은 의지,순수한 의지를 통한 행위만이 그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순수의지란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순일하고 일관된 맑은 의식의 흐름에서 터져 나오는 무의식적인
    자연스러운 의지를 말한다.
    그것은 공과 무아의 자리에선 깨끗한 마음에서 움터 나온다.그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야말로
    지극지순한 참된 선행이자 선악의 의식적 분별을 떠난 최고선이요 아주 맑고 깨끗한 몸짓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공에서의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가? 공이 공에 머문다면 그 것은 공에 대한 또 다른 집착이다.
    그것을 공병이라 한다.그 공병에 걸리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식이 되기 쉽다.
    어떤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 않을 뿐더러 끝을 알 수 없는 허무 속을 배회하기도 한다. 그 공에 대한 집착마저 여윌 때 그 공을 발판으로 순수한 의지가 도약하듯이 튀어나오는 것이다.그 순수의지를 우너 서원 혹은 발한다 하여 발원이라고 한다.
    원이란 맹세와 유사하다.맹세는 진실하고 확고한 의지의 표명이다.그러나 원이란 이러한 맹세와 같이 진실하고 확고한 의지의 표명이기는 하되,그것이 공의 바탕에 서 있기 때문에 순수의지요 깨달음과 중생 구제를 지향하기 때문에 종교적 순수의지로 작용한다.

    사홍서원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 걸어가야 할 길로 네 가지 큰 서원을 내세운다.
    그것을 사홍서원이라 하는데 불교 의식의 끝마무리 부분에서 한결같이 등장하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생무변 서원도(衆生無邊 誓願度)
    번뇌무진 서원단(煩惱無盡 誓願斷)
    법문무량 서원학(法門無量 誓願學)
    불도무상 서원성(佛道無上 誓願成)

    보살의 인생 목표는 상구보리와 화화중생이다.자리적 측면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이타적 측면에서
    중생을 구제한다.이 사홍서원 중 첫 번째 항목인 중생무변 서원도는 보살의 이타적 측면 즉 중생
    구제의 원을 다짐하는 내용이고 나머지 셋은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우며 불도를 이루겠다는 자리적 측면
    즉 자신의 깨달음과 관련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살이 이러한 서원을 발함에 있어 자기 자신 보다도 중생을 구제하는 구체적인
    일에 먼저 나선다는 것이다.깨달음은 중생을 구제하는 구체적인 과정 속에서 그 싹을 틔우며 가시적인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인간 대 인간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그것도 현재의 이 순간에서뿐만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에 걸쳐서 개개의 사물 하나하나는 삼라만상과 인연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나라는 현 존재는 과거의 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왔으며 그것은 과거의 나임이 분명하다.미래는 나의
    현재에 대한 기대로서 존재하며 그러한 미래가 또한 나의 현재를 조건지으며 현재의 나와 관계를
    맺고 있다.그것은 미래의 나이기도 하다.또 그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에 모든 삼라만상이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속에 나의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시간과 공간이 들어와 있는셈이다.
    나를 중심으로 삺펴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타자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모든 것은 타자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이렇게 나와 남은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함께 존재하고 있다.
    자기 중심이 곧 타자 중심이요 타자 중심이 곧 자기 중심이다.그래서 타자에 대한 구원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구원이요 때달음이 되는 것이다.공의 장 무아의 장 연ㅇ기에 장에 서면 그렇다.
    서로에 대한 이러한 관련은 과거.현재.미래에 걸쳐서 끊임없이 전개된다.그래서 중생 구제가 가이없는 것이고 번뇌 타파가 다함이 없는 것이며 법문을 배우는 것이 무한량하며 불도의 성취가 위없는 것이다.
    보살들은 이렇게 가없는 서원을 세운다.아미타불이 된 법장보살도 이 세상에서 구제받지 못한 중생이
    단 한사람만 있어도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고 서원을 세웠다.이밖에도 법장보살에게는 47가지 원이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지금도 지옥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고 있다.중생 구제 행위와 실천의 모범을 보여 주는 보현보살에게는 10대원이 있다.그밖에 아촉불의 12가지 원 약사여래의 12가지 원 등이 있다.
    이렇게 각기 불보살마다 서원을 달리하는 것을 별원이라 하는것에 대해 모든 보살이 한결같이 지녀야 할
    원 즉 사홍서원을 총원이라 한다.
    사홍서원은 오늘날 법회 의식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로 불려지기도 한다.

    중생을 다 건지올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회향
    서원과 관련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또 하나의 덕목으로 회향이 있다.회향이란 내가 쌓은 공덕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다.일종의방향 전환이다.이것은 업의 법칙을 부정한다 자업자득인 업의 법칙에서 벗어나 자기가 지은 행위가 자기에게만 돌아가지 않고 남에게로 향하기 때문이다.그것은 업의 뿌리 자체도 근본적으로 공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공의 자리에 서면 모두가 서로 맞물려 있어 나의 행위가 이웃과 통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무리 죄업이 두터운 인간일지라도 아미타불에 일심으로 의지한 결과 아미타불의 중생 구제를 향한 간절한 마음,즉 회향의 힘에 의해서 그 숙업이 녹아 구원 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회향은 자기가 닦은 공덕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게 하는 열린 교류요 자비의 실천이다.
    나와 너 나와 이웃 나와 세계에 이러한 회향의 법칙이 작용하여 남이 잘못한 대가를 내가 대신 받으며
    내가 잘한 대가를 남에게 돌린다.남을 위해 기도하고 남을 구제하기 위해 간절히 서원을 발하는 자비심이 용솟음치게 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모든 행사의 끝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예식으로서 회향식을 올린다.행사의 과정에서 쌓은 공덕을 이웃을 향해 회향하겠다는 결의를 다짐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내가 닦은 공덕이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헤매는 이들에게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될 수 있다는 회향,그것은 서원과 더불어 이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희망의 등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