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은반지
따스한 오후였다.
문득 어머니가 보고싶어 어머니 산소엘 갔다. 벌판이 눈아래 널려 있었다.
정말 어머니는 정이 많으셨다.
정 많은 어머니가 정을 떨어놓는 일이 쉬운일은 아니었을 것이고 어머니는
누구라도 정답게 인정을 나누셨다.
그때는 박물장수 아주머니들이 집집을 다니며 장사를 했다.
구리무, 박가분, 참빗, 치분, 등 새롭고 신기한 물건을 한보따리 이고다녀
그들이 방문하면 온동네 처녀들은 물론 아주머니 들까지 대청마루에 가득
모여 구경도하고 어쩌다 물건을 사는 사람이 생기면 뚜껑을 열고 냄새라도
한번 맡아보고 부러운 얼굴로 사지못하는 아쉬움을 가난함으로 돌려
"언제 나도 한번 저런 화장품을 한번 써보나" 하는 신세타령으로 이어졌다.
사실 그 아주머니의 얼굴은 햇볕에 그을리고 바람에 단련되어 화장을 해도
별 효과도 없어 보였지만 여자들은 누구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똑
같은가 보다.
어머니는 부러워하는 누나에게 구리무 한개를 사주셨다.
누나의 좋아하는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떤날은 화장품을 사는 사
람이 없어 박물장수 입담이 게속될때 ,
"알았네 내가하나 팔아줌세" 하며
"네가 같고 싶은 것으로 하나골라라" 며 누나를 바라보고 선뜻 나서지 못
하는 누나를 재촉하셨다.
"아주머니도 이것 하나 끼어 보세요. 손이 예쁘시니 잘 어울릴거예요"
거칠고 주름진 어머니 손에 끼워진 꽃무늬의 은반지는 굵은 마디의 어머
니 손가락에 끼워저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가 패물을 사는 모습은 그 후
로 한번도 본일이 없다. 어머니는 은반지를 분신처럼 끼고 다니셨다.
언젠가 서울사는 친척이 누나 시집갈때 끼라고 사다준 빨간색의 보석 반지
도 시집가는 누나에게 넌즈시 건네주며 패물을 많이 해주지 못함을 미안해
할때 누나와 서로 갖지 않겠다고 미루다 누나의 눈물과 함께 보내진 후로
줄곳 어머니는 은반지만 사랑하셨다.
"엄마 이제 이반지는 그만 끼고 다니세요" 하며 어느날 내가 빼내려 하였을
때에도 어머니는 거절 하셨다.
나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어머니의 손마디가 굵어저 반지가 빠져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았다. 그때 시골의 인심은 늦은 길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남자는 사랑방에 여자는 안방에서 재워주고 아침까지 멱여 보냈다.
그 아주머니들은 떠나면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머리빗 하나라도 기여코
놓고갔다.
어머니는 철지난 옷가지며 골방에 쌓여있는 고구마 몇개라도 담아주며 또
들리라며 인정을 베푸셨다.
어머니는 여든넷 되시던 추운 겨울 모진바람을 두고 떠나셨다.
동전세닢 저승여비를 입에 물고 추운 겨울인데도 삼베옷으로 갈아입고 홀
홀이 떠나셨다.
겨울이면 어머니는 칼국수를 잘 만드셨다.
가난한 우리집에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이 그것이였고 칼국수는 이웃과
의 교분을 나눌 수 있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어머니의 칼국수 솜씨는 지금
도 따라올 사람이 없을 것이다.
멸치와 다시마로 국물을 내고 각종 양념으로 맛을내여 호박을 무쳐 위에
얹어 먹으면 누구나 한그릇 이상은 먹었다.
쌀이나 보리같은 곡식이 귀했기 때문이지만 겨울에 먹는 칼국수는 주식
이였다.
국수를 밀어내는 홍두께는 내 키 보다 더 크고 밀어낸 국수 판은 내 이불
만했다. 국수를 밀어 썰어내고 나면 국수 꼬리가 남는다.
그 꼬리는 내 차지이다. 국수를 삶아내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어머니는 부지깽이에 그것을 얹어 노릇노릇하게 구워내어 내게 주셨다.
바삭바삭 하는것이 지금의 과자와는 비교할수 없는 맛이 있었다.
실은 그 맛은 요즈음 아이들은 먹지도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국수를 썰어
가는 솜씨는 한석봉의 어머니도 부러워 했을겄이다. 그럴때도 어머니의
손에서는 은반지가 빛나고있었다.
어쩌다 아버지가 미꾸라지라도 한 바가지 잡아오는 날엔 추어탕을 끓여 국
수를 말아먹었다. 이웃 어른들을 부르고 오지 못하는 집은 한그릇씩 담아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심부름은 모두 내차지였다. 나는 춥다고 변명을해도 어머니는 나를 달래어
이웃에게 정을 나누셨다. 체격은 작았지만 통이 크시던 어머니는 늘 나누
며 살았으며 베품을 주셨다.
"오늘 누구 생일이예요" 너스레를 떠는 이웃들의 웃음과 어머니의 미소가
동네 사람들 가슴에 새겨저 어머니를 인심좋은 아주머니에서 인심좋은 할
머니로 기억하게 하였다.
꽃상여를 만들어 놓고서도 복많은 할머니를 먼저 태운다고 하는 동네사람
들의 고집으로 기여코 맨처음 꽃상여를 타고 이승을 떠나가셨다.
가난하지만 슬기로우셨던 어머니는 들일을 나가실때에는 꼭 얼개미 체를
가지고 가셨다. 밭을 매고 돌아오실 때는 논두렁 아래 물이고여 있는곳에서
민물새우며 송사리 붕어등을 잡아다 큰 소반위에 올려 놓고 티를 고르셨다.
나는 어머니 옆에서 재미로 그 일을 도우며 어머니 치마폭을 떠난적이 별로
없었다. 민물새우와 송사리의 영양이 오로지 당신의 칠남매에게 영양을 보
충하기 위함일 것이다.
누에를 치고, 솜을 틀고, 기름 짜고, 길쌈하고, 어머니가 누워있는 모습은
거의 볼수없었다. 어머니는 슈퍼맨 처럼 작은 체구를 한시도 쉬게 하지 않
았다.
딸깍 딸깍 거리며 명주를 짜던 어머니의 모습은 직녀의 모습이 아닐런지?
나는 아버지의 기억보다 어머니의 기억이 더 많다.
막내아들 이라고 어머니는 나를 안방에서 재우셨다. 형들은 아버지와 사랑
에서 잠을 자고 나는 어머니를 독차지하고 어머니의 사랑은 내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의 모든것이고 나 또한 어머니의 희망이였다.
"이제가면 언제오나 북망산천 어드메뇨"
선소리꾼이 상여 맨 앞에 올라서서 구성지게노래하면 상여를 멘사람들이
"어화어화" 뒷소리를하며 차가운 바람을 가르고 떠난다. 어머니와 영영
이별이 서러운데 애 저들은 노래할까? 서글픈 노래로 더많은 눈물을 흘리
게할까? 상여를멘 사람들이 얄밉기도 했다.
두손을 가슴에 얹어놓고 자느듯 누워 게신 어머니의 손틉이 모두 닳아
없어저 제 모습을 한것이 하나도 없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어머니의 손틉이 왜 이제서야 보이는 걸까?
누가 저 손톱을 저렇게 만들었나, 굵은손 마디와 거친주름이 앙상한 손에
서 세월의 흐름의 자죽을 남겨 놓았다.
언젠가 박물장수 에게서 쌀 한됫박을 주고산 이그러진 은반지가 어머니
손가락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한없는 눈물이 흘렀다.
색이 변하면 치분으로 광을내어 은반지에 새겨있던 예쁜 꽃 모양의 무늬는
사라지고 볼품없는 회색 빛의 반지가 되어 어머니 손가락에 남아있는 것이
가슴 아팟다.
불효아들의 속죄인가.
어머니의 앙상한 손가락과 다 달아 볼품없는 은반지와 일그러진 손틉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내 눈물의 물꼬를 터놓았다.
겨우 일그러진 은반지 하나 가지고 한많은 세상을 떠나시면서도 그 많은
정을 떼어놓고 가기위해 매서운 겨울바람을 불러와 정 떼는 일을 맏기고
훌쩍 떠나셨다.
어머니의 은반지가 나의가슴을 회한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배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일그러트려 서러움에 빠지게 했다.
효도라는 새삼스런 단어를 사용치 않터라도
"부모님 살아 계실때 섬길을 다하라" 하신 옛 성현들의 충고를 다시한번
되새기고 집집마다 부모님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세상이 되
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보고싶은 어머니의 손톱, 어머니의 찌그러진 은반지가 내 서러움
을 충동질 한다. 그마디 굵은 손으로 나누셨던 사랑이 새삼 받고싶다.
어머니 산소에서 바라본 하늘은 어른거렸다.
알싸한 바람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일것이다.
난 그 눈물을 닦지 않고 한참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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