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多笑 즐거움 /神奇. 감동

내 전부를 줘도 아깝지 않을 사람을 위해

靑 波 2010. 9. 20. 11:01


 


내 전부를 줘도 아깝지 않을 사람을 위해

스물네 살 때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점심시간에 알레르기 비염을 치료하러 회사 근처 병원에 다녔는데, 그이 또한 같은 병원에서 요추염좌라는 척추 근육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꼭 마주쳤고, 빠듯한 점심시간을 이용하다 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수납처에 대신 줄을 서 주면서 서로를 챙기게 되었죠. 우리 관계는 자연스레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얘기가 오갈 무렵 그는 내게 물었습니다. “나랑 결혼하면 월세방부터 시작해야 돼! 괜찮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나의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던 사람. 뿐만 아니라 그의 병이 천 명에 한 사람꼴로 있다는 척추 질환이며 완쾌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더욱이 아버님 역시 같은 병을 앓다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저는 단지 그의 짐을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예상한 대로 부모님은 결혼을 반대하셨습니다. 없는 시골 살림에 소 팔아 대학 보내 놓고 남들이 탐내는 직장에 다니는 버젓한 딸이 그런 사람과 결혼한다니 친정엄마는 곡기까지 끊으셨습니다. 나중에는 그 사람마저 내 행복을 위한다며 돌아서기를 바랐지요. 하지만 그에게는 분명 내가 필요하고 나 또한 그가 아니면 안 되는 걸 잘 알기에 돌아설 수 없었습니다.

1990년 10월 우리는 결혼했습니다. 친정에서는 기어이 고생굴로 들어간다며 결혼이 무효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시댁에서도 그런 친정 식구들 민망타 하여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썰렁한 식장에서 그와 나는 이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예식장이 생긴 이래 폐백 없이 결혼식을 마친 유일한 부부로 기억된 우리는 결혼식만큼이나 살림도 단출하게 시작했습니다.

아버님의 오랜 투병으로 그는 의무만을 잔뜩 짊어진 '없는 집' 외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월세 보증금 백만 원짜리 방에서, 자취할 때 쓰던 무쇠솥 1개, 양은냄비 1개, 수저 2벌, 밥공기 2개를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신혼여행은 혼수를 절약한 돈 천이백만 원을 들고 아버님 병원비를 정산하기 위해 차로 8시간을 달려 시댁에 가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 뒤 우리는 뭐든 한 개 아니면 두 개를 고집하며 알뜰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2년 뒤 아버님께서 재활 치료를 받고 우리 집에도 희망이 보일 즈음, 설마설마 했던 남편의 병이 악화되어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급기야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겨나 견뎌 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신이 우리 사랑을 시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같은 자세로 1분이 지나면 극심한 고통이 덮쳐 잠을 잘 수도 없게 된 어느 날 새벽녘, 남편은 네 발로 엎드린 채 행여 내가 깰까 봐 조심스레 시골집에 전화해 울먹였습니다.

“아버지! 나 아무래도 마지막이 될 것 같아요. 이 사람 불쌍해서 어떡해요? 나 만나 고생만 했는데….”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부자의 흐느낌. 그는 눈물 콧물 범벅으로 돌아가신 '엄마'를 부르며 조그맣게 울부짖었습니다. 나중엔 잠든 척하는 나를 꼭 안고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며 차라리 죽게 도와달라고 오열했습니다.

그때 남편은 척추 속에 움직이는 희귀한 혹이 생겼다는 새로운 진단을 받았습니다. 치료를 위해 신경을 잘라 내면 평생 장애가 남는다며 의사선생님은 수술에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겨우 그와 2년 살았는데, 내 몸에는 우리 아기가 막 태동을 시작했는데…. 그와 결혼하고 제일 많이 울었던 날입니다.

그 뒤 그는 더 큰 병원으로 옮겨 척추에 구멍을 여섯 개를 뚫고서야 혹을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물론 잘라 냈던 신경은 아직까지 그의 몸에 어떤 변화를 주지 않고 있지만 언제 다시 재발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네 다리로 방바닥을 기었던 지난날에 비하면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금 그는 구멍 여섯 개의 척추에 인대가 꽉 채워져야 힘을 받을 수 있는 그리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 나와 두 아이 그리고 편찮으신 아버님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아슬아슬 서 있는 그를 보는 것만도 안쓰러운데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 때문에 7, 8시간 서서 강의하는 그를 위해 저는 어찌해야 할까요? 작은 힘이나마 그의 짐을 나누고 싶지만 그는 아직도 그냥 지켜봐 달라고 합니다. 이 다음에 아버님처럼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되는 그때, 우리 가족을 위해 자기 대신 애써 달라고 눈물로 부탁합니다.

비록 10년 넘게, 그와 함께 하는 삶이 가파른 언덕길의 연속이었지만 그런 내 삶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다. 내 전부를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기에.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 여유를 찾아 내 집도 장만하고 부모님 모실 준비를 끝냈습니다. 제게 작은 바람이 하나 있다면, 나머지 절반의 인생을 온 가족이 서로 아끼며 건강하고 예쁘게 살아가면서 먼 훗날 “나 괜찮게 살았노라” 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필자 : 윤희옥님
출처 : 월간《좋은생각》 2002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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