訓練判官을 지내신 동생 斗樞할아버지 상연암 묘소
열녀(烈女) 분성배씨 정려각(旌閭閣)
<소재지:울산시 중구 반구동 744번지>
열녀 배(裵)씨는 분성배씨 15세손인 선전관 두원(斗元 163?~)의 따님으로,
임란공신인 퇴사재(退思齋) 이응춘(李應春)의 5대손인 이하형(李夏衡)에게
출가하였으나, 부군이 재행(再行)을 다녀간 후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시가
로 와서 전력을 다하여 6년을 하루같이 간병하였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이고 심지어 등창까지 나서 병이 더 깊어 졌다.이에 그녀
는 허벅지 살을 베어 부군의 환부에 부치는 등 갖은 애를 썼다.
그래도 효과가 없고 생명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서 피를 입에 넣어 7일이
나 연명토록 하였다.
부군이 별세하고 양례(襄禮)날 흰등(가마에 흰천을 두른것)을 타고 산지(山
地)까지 가서 양자인 둘째조카 정재(廷栽)로 하여금 몰관(沒棺)을 시켜 후사
를 잇게 하고,소 대상을 지낸 후 담사(譚祀)날 산소에 다녀와서 친정 백남(伯
男), 동생, 조카와 양자인 아들을 불러놓고
"여자는 자고로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그 집 후사를 잇게 하는것이 도리인
데 나는 시집와서 무일점(無一点) 혈맥이라 이 집에 온 흔적이 없으니 너희
들은 자손대대로 '수척(守戚)'을 하기 바란다." 하는 유언을 남기고 피를 토
하고 운명하였다.
유언에 따라 지금까지 양가(淸安李氏 盆城裵氏)에서는 혼인 하지않음은 물
론이거니와 양가 주손(胄孫)의 유복지친간(有服之親間)까지는 호형 호숙
(呼兄呼叔)하고 있으니 향중 유림에서 부러워 하고있다.
정려각
울산 유림의 상소로 1745년(영조 17)에 열녀(烈女)의 정려(旌閭)가 내려와
서 동년 10월에 열녀각(烈女閣)을 반구동(伴鷗洞)에 건립하여 보존하던 중
1982년울산시의 도시계획으로 부득이 현 위치로 이건하여 공인(恭人)의 행
적과 이건이유를 적은 비(碑)를 여각(閭閣) 안에 세웠으며, <울산읍지>
열녀편에 첫 번째로 등재되어있다.
출처 : 분성배씨 종사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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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판관(宣傳判官)을 지내신 배두원(裵斗元)할아버지는 직계 9대조이신데,
묘소가 울산 동구 남목에 동생 訓練判官과 왕릉처럼 큰 규모로 있었는데,
일대가 개발되면서, 아파트가 들어서게되어 북구 농소 동산으로 이전하여 매
년 가을 묘제를 지내고있으며, 선전판관 할아버지는 5형제의 둘째였으며, 아
래로 아들 다섯 딸 한분을 두셨는데, 정려각의 주인이신 열녀가 이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