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마음이 생기면 만법이 생긴다
임제가 보청(普請)으로 김을 매고 있을 때, 황벽이 오는 것을 보고는 괭이를
붙잡고 서 있었다. 황벽이 말했다. "이 놈이 피곤한가?"
임제가 말했다. "괭이를 아직 들지도 않았는데, 무엇이 피곤하겠습니까?"
황벽이 바로 때리자, 임제가 방망이를 낚아채서 밀어서 넘어뜨려 버렸다.
황벽이 소리쳤다. "유나! 유나! 나를 좀 일으켜 세워다오."
유나(維那)가 다가와 부축하며 말했다.
"스님 어찌하여 저런 미친놈의 무례를 용납하십니까?"
황벽은 일어나자마자 곧 유나를 때렸다.
임제는 괭이로 땅을 파며 말했다.
"모든 곳에서는 火葬을 하지만, 여기서 나는 일시에 산 채로 묻어버린다."
마음의 실상(實相)을 알지 못하면 의식(意識)은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과 같다. 살아 있음은 곧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함이다.
마음에는 시간이 없다. 늘 지금 이 순간일 뿐이다. 법에는 공간도 없다.
늘 바로 여기 눈 앞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는 늘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살아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보통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테두리 속에 살고 있다고 여긴다.
이렇게 여기는 것은 의식 때문이다.
의식의 특성은 차별하고 나누는 것이며,차별하고 나누어서 어느쪽은 취하고
어느 쪽은 버린다. 그러므로 과거의 일이 따로 있고 현재의 일이 따로 있고
미래의 일이 따로 있으며, 이곳의 일이 있고 저곳의 일이 따로 있다.
{금강경}에서는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였고,
{반야심경}에서는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시간이 없다는 말이다.
시간이란 바뀌어가는 모양을 기억하고 저 모양과 이 모양을 구분하여 붙인
이름이다. 의식은 모양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모양들은 끊임 없이
바뀌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은 의식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경전에서 오온(五蘊)·십팔계(十八界)라는 경험세계는 무상(無常)하게 변화
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의식은 곧 모양이므로 의식에는 공간과 시간이 있다.
그러나 실상(實相)은 곧 무상(無相)이라고 하듯이, 의식의 본성은 모양이
아니다. 모양이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다.
마치 호수의 수면이 바람에 따라 끊임 없이 다양한 모양으로 물결치듯이,
의식도 마음이 인연을 따라 끊임 없이 다양한 모양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한편 물결이 아무리 다양하게 변하더라도 호수는 항상 그대로이듯이,
의식이 아무리 다양하게 변하더라도 마음에는 변화가 없다.
물결이라는 모양은 바람을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물의 움직임이다.
마찬가지로 의식이라는 모양은 인연을 따라 움직이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마음은 움직임을 통하여 의식이라는 모양으로 나타나고 사라진다.
'마음이 생기면 만법(萬法=만 가지 모양)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만법도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의 변화하는 모양을 보고서 모양 없는 마음을 파악할
수가 있다.그러므로 바로 지금 눈 앞에서 움직이며 다양하게 변화하는
모양으로 나타나는 의식 속에서 변하지 않는 마음 그대로 있을 수 있어야
만, 비로소 우리는 본성에 따라 여여(如如)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의식의 모든 변화하는 모양은 오히려 헛된
모양으로서 죽은 것이다.
자! 그러면 오직 모양으로만 드러나는 의식 속에서 어떻게 하여야 변함
없이 살아 있는 사람 노릇을 할 수가 있을까?
지금 눈을 떠고 바라보는 것이 눈도 마음도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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