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열반(涅槃)2
그것은 붇다 의 새로운 설명 방식이었다. 이제까지 붓다 는 고조된 욕망을
말하는 데 '갈애'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찬가지로 욕망
의 고조된 상태를 나타내면서 '연소'라는 말을 썼던 것이다.
그 새로운 용어는 불교의 흐름을 따라 오래도록 큰 영향을 미쳤다. 후세의
불교인들이 흔히 '욕망의 불꽃'이라 했을 때, 그것도 이 계열에서 생겨 난
용어로 보아야 하리라. 그리고 붓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 비유적인 표현
을 따라 이야기한다면 결국 그 연소하는 욕망을 가라 앉혀야 한다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 완전히 꺼질 때, 거기에 나타나는 시원하고
편안한 경지, 그것이 열반임에 틀림없다. 열반이라는 술어는 이런 인생의
현실에 대한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이상의 경지를 뜻하는 말로서 생겨났던
것이리라.
열반이라는 말은 그 성립 과정에서 본다 해도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표현
이다. 깊은 생각 없이 이를 대하면 천국이니 극락이니 지복(至福)이니 하
는 말에 비겨 매우 매력이 없는 말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후세의 불교인 중에는 이것을 소극 무위의 경지라고 잘못 생각한다든지,
회신 멸지(灰身滅智 ; 육체적,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의 경
계로 판단한다든지 하여 마침내는 열반으로써 죽음을 뜻하게까지 한 사람
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가당치 않은 해석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눈을 돌이켜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해 놓은 글을 검토해 보자.
그것은 자푸카다카(閻浮車)라는 외도가 사리푸타를 찾아와서 벌인 문답이
다. 그 사람은 낡은 주석에 의하면 사리푸타의 조카라고 되어 있거니와,
어쨌든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이인 듯 해서, 잔푸카다카가 불교의 기본적인
개념에 관해 꼬치꼬치 물은 데 대하여 사리푸타는 하나하나 명쾌하게 대답
하고 있다. 그 대답은 붓다의 설명 방식과는 약간 달라서 정의적, 주석 적
인 점은 있으나, 역시 붓다의 수제자답게 참으로 명쾌하다고 하여야겠다.
그런 질문과 대답이 열 여섯 개의 경에 기록되어 그것들이 일련의 경군(經
群;염부거상응)을 이루고 있거니와, 그 첫째 경의 내용이 이 열반에 관한
문답이다.
흔히들 열반이라고 하는데,그것은 대체 무엇을 말함이냐는 것이 이 외도의
질문 내용이었다.
"벗이여,무릇 탐욕의 소멸,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 것을 일
컬어 열반이라 한다."
그러면 거기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이냐고 다시 질문을 받은 사리푸타 는 이
렇게 대답했다. "벗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야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
법이다.그것은 즉 정견,정사,정어,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그리고 사리푸타는 "벗이여, 이것은 선한 길이다. 노력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 는 말을 덧붙였다.
참으로 명쾌한 주석이어서, 열반에 관한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한 것 같다.
여기에 딴 말을 덧붙인다는 것은 오직 그 개념을 애매 모호하게 만들뿐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로서 한 가지만 거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에 의해 현대인들은 어쩌면 열반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인간의 이상을 생각해 낸 것은 결코 불교만이 아니라는 사실
이다. 만약 이런 이상이 불교만의 주장이었다면, 우리는 도리어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그 관념을 검토해 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널
리 세계의 온갖 사상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
것은 결코 불교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는 것이라 하겠다.
그 중에서도 언어 표현상 가장 비슷한 것은 스토아(Stoa)의 철인들이 인간
의 이상적인 경지라고 생각한 '아파테이아(Apatheia)'의 관념이다.
그들도 또한 인간의 불행은 격정(pathos)에 의해 이성이 방해되고 영혼이
구속됨으로써 생긴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격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를 최고의 이상이라 여겨, 그것을 아파테이아라 고 불렸다.
또 그리스의 에피쿠로스(Epikouros)가 '아타락티아(ataraktia)'라고 부른
경지도 그것에 가깝다.그것은 어지러움이 극복된 내적 평화의 상태를 말한
다. 저 쾌락주의자들이 그려 낸 인간의 최고 경지가 이런 것이었다는 것은
퍽 재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다시 근대에 와서 칸트(Dant)가 말한 '자유'
의 개념 또한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그는 실천 이성(의지)이 자기 법칙을 따를 때 그것이 자율적 자유요,이와
반대로 자연적 욕망에 지배될 때 그것은 방종의 타율이라고 했다.그런 것
에서 우리는 열반의 생각과 입장을 같이하는 사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다.
일찍이 붓다는 어떤 경([상응부 경전] 1:63 갈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은 갈애에 의해 인도되고 갈애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
갈애 야 말로 일체를 예속 시키도다.
붓다가 열반을 말씀할 때, 결국은 이런 예속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공적 무위(空寂無爲)의 소극적인 경지라고 할 수 없다.
거기서 불이 꺼지듯이 소멸되어야 하는 것은 갈애이다.그리고 번뇌의 불꽃
이며,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일 뿐이다.
인간 자체가 여기에서 "소멸하여" 어딘가에 가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여기 이 땅에 있는 것이다. 그를 예속하던 갈애가 소멸됨으로
써, 그는 완전한 자유와 안온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의 길,
평화의 길을. 그리고 그것이 열반이다.
- 마지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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