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17. 머무름 없이 생겨난다
오늘날 배우는 자들은 도무지 법(法)을 알지 못한다.
마치 양이 냄새를 맡아 마주치는 물건마다
모두 입속에 쳐넣는 것처럼,
하인과 주인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는 삿된 마음으로 도에 들어가고자 하므로
시끄러운 곳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이름하여 참된 출가인이란 바로 참된 속가인이다.
무릇 출가한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평상하고
진정한 견해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하며,
부처와 마구니·참과 거짓·범(凡)과 성(聖)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마구니와 부처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바로 한 집에서 나와 다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업짓는 중생이라고 부를 뿐,
아직 참된 출가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예컨데 지금 부처와 마구니가 한 몸으로서
나뉘어 있지 않는 것이
마치 물과 우유가 섞여 있는 듯 하더라도
거위왕은 우유만을 마시는 것처럼,
밝은 눈을 가진 도 배우는 이라면
마구니와 부처를 모두 쳐버려야 한다.
그대가 만약 성을 좋아하고 범을 싫어한다면
생사(生死)의 바다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할 것이다.
본래면목과 계합하려면 어디에도 머물지 말아야 하고
어떤 것도 붙잡지 말아야 한다.
본래면목은 '여기다' '이것이다'라고
의식할 만한 그 무엇이 아니다.
의식적으로는 어떻게 하여도 본래면목을 파악할 수가 없다.
본래면목이라고 일컫지만 사실 본래면목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정해진 대상은 없다.
본래면목은 지금 이 순간의 경험 가운데에서
체험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지금 한 잔의 차를 마시는데
'무엇을 가지고 차를 마시는가?'하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컵을 가지고 마신다든가,
손과 팔과 입술을 사용하여 차를 마신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제 다시 질문을 '무엇이 차를 마시는가?'하고 물어보자.
여기에 대한 대답은 아마 '내가 마신다' 혹은 '사람이 마신다'
혹은 '마음이 마신다' 등등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면 다시 '나'니 '사람'이니 '마음'이니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나'니 '사람'이니 '마음'이니 하는 것은 구체적인
하나 혹은 몇 개의 사물로는 지칭될 수가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육체·느낌·기억·욕망·의식 등을 '나'와 관련하여
열거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것들이 곧 '나'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런 것들만으로는 '나'를 말하기에 무언가 부족한 것이다.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육체·느낌·기억·욕망·의식 등의 변화 속에서
그 변화와는 무관하게 '나'라는 것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경험되는 모든 것들의 생멸 속에서도
생멸과는 상관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짐작은 된다.
그러면 이렇게 짐작되는
그 '무엇'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만약 이 '무엇'이 육체·느낌·기억·
욕망·의식 가운데에 속한다고 하면,
이 '무엇'은 생멸과 상관 없는 것이 아니라
생멸하는 것이다.
만약 이 '무엇'이 육체·느낌·기억·욕망·의식 등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무엇'은 짐작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엇'은 육체·느낌·기억·
욕망·의식 등에 속하지도 않고
별개로 떨어져 있지도 않다.
자! 그러면,
이 '무엇'을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육체의 움직임·경험되는
느낌·떠오르는 기억·발동되는
욕망·이런 저런 것들을 의식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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