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15. 모양 없는 마음자리
도 배우는 이들이여! 얻었으면 바로 쓸 뿐 또다시 이름에 집착
하지는 않으니, 이것을 일러 그윽한 뜻[玄旨]이라고 한다.
내가 설하는 법은 천하의 사람들이 설하는 법과는 다르니,
예컨데 문수와 보현이 눈앞에 나타나서 각각 하나의 몸을 나
투고 법을 묻는다고 할 경우, 그들이 "스님께 묻습니다"라고
말하자마자 나는 벌써 알아차려 버린다.
나는 편안히 앉아 있지만 도 배우는 이들이 찾아와 서로 만나
볼 때면 나는 모조리 알아차려 버린다.
어찌하여 이러한가?
나의 견처(見處)는 달라서, 밖으로는 범부와 성인을 취하지
아니하고 안으로는 근본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며, 꿰뚫어
보아서 다시는 의심하거나 잘못됨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一切唯心造] 만들어진 것은 고정된 것으로 남아 있지 않고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무상(無常)한 변화를 겪는다. 마음은
생멸하는 인연법을 만들어내지만, 마음 그것은 생멸하는 것
이 아니다.
생멸하는 세계는 마음이라는 바다 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물결과 같다.
이처럼 5온·18계의 만법(萬法)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
나고 사라지는 허무한 것이다.
그러므로 물결이 모두 물이듯이 만법은 모두 마음이다.
마음은 모양이 없다.
모양이 없으므로 마음은 생기고 없어지거나 크지고 작아지
거나 더럽고 깨끗하거나 할 수가 없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공(空)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5온·18계의 만법은 공(空)이다.
《반야심경》에서 5온이 바로 공(空)이며, 만법은 공의 모
습[空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5온을 5온으로만 알고, 만법을 만법으로만 알고, 18계를 18계
로만 알고 있는 것이 바로 범부의 견해이다.
그러므로 범부는 모양의 세계만을 보고 있다. 모양은 생기고
사라지는 무상한 변화를 겪는 생멸법이므로, 범부는 생멸법의
세계를 살아가면서 생노병사(生老病死)에 시달린다.
이처럼 범부가 생노병사에 시달리는 것은 전적으로 생멸하는
모양의 세계만을 알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모양의 세계만을 알고 있는 범부는 다가오는 인연에 반응하되,
인연에 끌려다니기만 한다.
그리하여 인연에 따라서 좋아하고 싫어하고 기쁘하고 슬퍼하
고 만족하고 불만족하고 흐뭇해 하고 분노한다.
그러니 매사가 풍랑 위에 떠 있는 배처럼 이러 흔들 저리 흔들
하며 안정되지가 못하다.
이런 자들은 불법(佛法)은 알지 못하고 부처의 모양을 숭배하며,
범부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고 선입견에 따라 무조건 배척하며,
보리(菩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나름대로 상상하여 추구
하고, 번뇌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복잡하고 불쾌한 생각과 느낌을 무작정 끊어 없애려고 한다.
불법을 알고 보면 모든 모양은 모양 없는 것 하나에로 귀결된다.
모양 있는 것은 곳 모양 없는 것이다.
[오온개공:五蘊皆空]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이 곧 모양 없는 공
(空)일 뿐임을 통달한다면, 어떤 인연이 다가오고 어떤 경계에
마주하더라도 늘 변함 없는 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쉬고 있을
뿐이다.
모양 있는 경계는 서로가 달라서
모두가 분별되고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모양 없는 공인 마음은 다를 수가 없어서 분별과 취사선택이 없다.
분별과 취사선택이 없는 모양 없는 마음자리에 확고히 머물러 쉬면,
경계를 마주하여 아무리 눈·귀·코·혀·몸·의식을 사용하더라도
늘 여여부동(如如不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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