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乘正宗分 第三
제3분 대승의 바른 종지
'대승(大承-Mahayana)'이란 '소승(小承-Hlnayana)'의 상대적인
말로서 큰 수레라는 뜻입니다.
자기 혼자만의 해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한꺼번에 태우고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저 언덕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큰 '대(大)'는 단순히 크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다', '훌륭하다', '위대하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또한 '승(承)'의 의미도 '탄다'라는 뜻을 뛰어넘어 법(法)이나
가르침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대승(大承)'은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종지(宗旨)'란 가장 으뜸이 되는 취지와 원리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바르고 으뜸이 되는 위대한 가르침이
바로 이 '대승 정종(大承 正宗)'인 것입니다.
과연 어떤 원리가 여기에 담겨 있기에 이 짧은 구절을 보고
『금강경』에서 아니 많고 많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가운데에서
가장 바르고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라고 하였는지 눈여겨 보아야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모든 것이고, 또한 불교의 참생명일 것입니다.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降伏其心이니
불 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셧다.
"모든 보살마하살을 응당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니라."
여기서 '보살'은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등 어떠한
위신력이 있는 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베풂을 나누고
살아가는 사람, 깨달음에 눈이 열려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야말로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도 마하살이니 큰 마음을 내어
시원하게 삶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는 큰 중생입니다.
사람이 가장 사람답게 사는 길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항복받는 일입니다.
잘난 마음 못난 마음, 선한 마음 악한 마음,
교만한 마음 열등한 마음, 우쭐한 마음 비굴한 마음 등
모든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일으키는 우리들의 마음은
모두 항복잗아야 할 마음들입니다.
왜냐하면,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이요,
어딘가에 집착하고 안주하고 빠져있는 마음이요,
그래서 편협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이러한 분별에 의하여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났을 때,
인생과 우주, 그리고 삼라만상의 실상(實相)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지닌 무한의 가치를 비로소 발휘할 수 있습니다.
무한의 지혜와 능력이 드러나며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그 마음을 항복받는 일을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니다.
수보리가 안주하는 문제와 마음을 항복받는 문제에 대해 설법을
정하였는데 마음을 항복받는 일을 먼저 말씁하십니다.
우리들이 회의를 할 때 의제로 나온 것들 중에서
나중에 나온 의제부터 처리를 한느 것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렇게 경전은 세심하게 배려되어 있어서
요즈음의 안목으로 보아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所有一切衆生之類인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난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我皆令入無餘涅槃하야 而滅度之하리니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세상에 있는 일체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
태에서 태어난 것, 습기에서 태어난 것, 변화로 태어난 것,
형색이 있는 것, 형색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들로 내가 무여열반에 들게 하고 제도하리라."
생명을 가진 모든 중생들의 종류를
아홉 가지로 보아 구류중생(九類衆生)이라고 합니다.
알에서 태어난 생명, 태로 태어난 중생, 습기에서 생겨난 중생,
변화하여 생긴 중생(예를들어 벌레에서 번데기가 되었다가
나비가 되는 그런 중생), 생각이 있는 중생, 생각이 없는 중생,
생각이 있기도 하고 생각이 없기도 하는 중생,
이렇게 하여 아홉 가지가 됩니다.
우리 사람들은 태생과 유색, 유상에 다 걸쳐 있습니다.
이렇게 큰 덩어리로 중생을 구분하였지만
사람 사람에 따라서 살아가는 모습은 정말 무궁무진합니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서가 아니고
주위에서 늘 대하는 사람 사람이 다 천차만별입니다.
부처인 내가 이렇게 각양각색의 형태로 살아가는 중생들을 다
제도하며, 또한 각각의 종류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은
중생들을 다 제도하고, 깨닫고 성불(成佛)하게 하며,
차별을 두지 않고 모두 다 저 무여 열반(無餘 涅槃)에 들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여 열반(無餘 涅槃-Anupadhisesa-nirvana)'이란
일체의 미혹과 번뇌를 다 끊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불생불멸
(不生不滅)의 도리를 증득한 해탈의 경지를 뜻합니다.
불교는 지혜(智慧)와 자비(慈悲)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가르침으로서 차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신분의 사람이던지, 어떤 사상에 젖은 사람이던지
분별하지 않고 평등한 자비로써 가르칩니다.
최고의 가치인 진리의 가르침으로 이끌어 갑니다.
왜냐하면 사람 사람의 본성이 평등(平等)하고
그 본성을 일깨우는 법이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호대 實無衆生得滅度者니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
"이와 같이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중생들을 제도하되 실은 제도를 받은
중생은 없느니라."
이 무슨 청천 벽력 같은 소리입니까.
불교는 끊임없이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하며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는 것입나다.
또 실제에 있어서도 부처님께서
무량 무수한 구류중생을 다 제도(濟度)하였습니다.
또 불교 삼천 년의 역사가 내려오면서 얼마나 많은
아픔과 고통을 부처님 덕분에 벗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실에 있어서는 제도를 받은 중생이 하나도 없다'
는 것이 쉽게 이해되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밀이 진실입니다.
줄래야 줄 수가 없고, 받을래야 받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도(濟度), 즉 성불(成佛)과 깨달음이란
사람 사람들이 본래로 갖추고 있는 것이며
개개인이 완전 무결한 상태입니다.
누구의 첨삭(添朔)이나 가감(加減)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털끝만큼도 보태주거나
덜어내어 줄 수 없습니다.
또한 중생들을 제도한다고 하나, 본래 중생이란 없습니다.
오직 우리들 안에는 부처만 있을 뿐입니다.
설사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부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제도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본성(本性)은 언제나 청정(淸淨)하며
적적(寂寂)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번뇌 망상(煩惱 妄想)을 제거하여
청정하게 할 일이 없으며, 동요하는 것을 붙들어
새로이 적적하게 할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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