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나눔의 쉼터/中要 6 經典集

금강경 강의 如理實見分 第五 (사구게)

靑 波 2003. 7. 25. 14:54
 
    如理實見分 第五 제5분 이치와 같이 사실대로 보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보고 상대(相對)도 보고 부처님도 봅니다. 또한 나름대로 세상 사는 이치도 보고 인생도 보고 진리도 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보고 또 보지만 과연 '진리대로', '진여의 이치대로', 실답게 보고 있는지요 진실은 진실로 보고 거짓은 거짓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진실을 비롯하여 부처와 모든 형상 있는 것들의 참모습은 지혜의 눈으로 바르게이해하여야 합니다. 무엇이던 본래의 모습대로 바르게 바라볼 때 문제의 해결은 아주 쉽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시각이며 또한 가장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결코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허무하게 보는 태도가 아닙니다. 개어있는 눈으로 보는 것이며 이치대로 보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身相으로 見如來不아 不也니이다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 견여래부 불야 世尊하 不可以身相으로 得見如來니 세존 불가이신상 득견여래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모양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부처를 때로는 여래(如來)라고 합니다. '진리(여;如)에서 오신(래;來)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그 자체', 우주와 삼라만상의 진실 생명 그 자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의 여래를 몸의 모양으로 볼 수 있겠는가 라고 묻는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 생존 당시 살아계신 부처님을 보고 '저 분은 부처가 아니야.'라고 생각하였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되었겠습니까.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서 숨을 쉬고 피가 흐르며 더욱이 거룩한 32상 80종호(三十二相 八十種好)를 지니신 부처님을 보고 "부처로 여기지 말아라." 하면 쉽게 납득이 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수보리는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몸의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의 육신이나 우리들 육체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진실하다면 언제 어디서나 늘 같아야만 할 것인데 시시각각 명멸해갈 뿐입니다. 부처님도 굶으면 뼈만 남기도 하고, 때로는 등창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결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이 아닌 것입니다. 그야말로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그러하니 신상(身相)을 보고 여래(如萊)라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게서도 당시 제자들에게 "육신을 보고 부처라 여기지 말라."는 가르침을 수없이 펴셨습니다. 아함부의 『바카리 비구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카리'라는 비구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부처님게 예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바카리 비구는 사람을 보내 부처님을 청하였습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슴이지만 부처님게서는 이 곳에 오셔서 저의 마지막 예배를 받아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오셔서 병자인 바카리 비구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카리 비구가 몸을 일으켜 세워 예배를 드리려 하였습니다. 그 순간 지금가지 인자하게 바카리 비구를 위로하던 부처님께서는 냉정하게 꾸짖었습니다. "너의 병들어 썩어가고 있는 몸뚱이를 일으켜 세워서 너와 별다를 바 없이 늙어 무너져 내리는 나의 이 몸뚱이에 예배를 드린다고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여래라는 존재를 그 동안 이 육신이 라고 여겼더냐. 그러고도 나의 제자라고 하겠는냐." 부처님은 이어서 그 유명한 법구(法勾)를 남깁니다. "법(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본다." 이처럼 여래를 보는 참된 지혜가 있어야 자신의 진실한 얼굴을 보게 되고 만물(萬物)의 실상도 바로 보게 됩니다. 경전에서는 사람 사람들의 참모습을 깨우치고저 하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자신을 사회적인 신분으로 한정하고, 교육이나 생활의 정도를 가지고 규정(規定)해 버립니다. 아니면 남녀, 노소를 가지고 한정해버리고 맙니다. 이와 같은 외적 조건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가지도 참 인간성, 진실한 생면체, 본래 면목의 실상이라고 한정해 버린다면 가지고 있는 보물을 조금도 활용하지 못하고 넣어두고 썩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유컨데 순금덩어리를 잘못 알고 쓸모 없는 돌이나 흙덩이로 취급한다면 그 손실은 너무나도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래를 사실대로 바르게 알라. 자기 자신을 본래의 모습대로 바르게 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쫒아서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부처님을 왜곡되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何以故오 如來所說身相은 卽非身相이니이다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모양은 곧 몸의 모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몸의 모양을 물은 것은 진리의 몸인 여래의 참모습을 밝히고저 한 것입니다. 그 뜻을 잘 간파한 수보리는 몸의 모양으로 여래라고 할 수가 없다는 대답뿐만 아니라, 부처님게서 말씀하신 '몸'이라는 말의 진실까지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몸은 참다운 진리의 몸, 마음의 몸, 영원한 법신(法身)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법신(法身)은 형상이 아니므로 형상에 떨어진다면 여래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없을 뿐만아니라 사람 사람들의 참다운 인간성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모양이 없는 것, 무상(無相)이 곧 절대적인 존재이고 여래이며 참 생명의 실상이며 우리들의 참마음자리이다 하는 관념도 떠나 보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형상이 아닌 것 여래, 참마음, 법신은 실은 형상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형상이야말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영원한 생명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영가(永嘉 665-713)대사는 육조 혜능(六祖 慧能)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뒤 조계산(曺溪山)을 내려오면서 그 유명한 '증도가(證道歌)'를 불렀습니다. 증도가란 영가 스님이 깨달으신 내용을 읊은 것으로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명실성즉불성 환화공신즉법신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우리가 협오하고 떠나 버려야 한다고 여기는 번뇌 무명의 성품이 곧 우리가 찾고저 하는 부처의 성품이며, 헛 것이고 환상이어서 허망하다고 생각한 이 내몸이 바로 법신이구나.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불 고수보리 凡所有相 이 皆是虛妄이니 若見諸相非相하면 卽見如來니라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부처님게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었다. "무릇 형상이 있는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불교 경전은 조직적이어서 산문(散文)으로 나오다가 내용을 압축하여 시(詩)로 표현합니다. 이것을 게송(偈頌-Gatha)이라고 하는데 특히 네 구절로 된 게송을 사구게(四句偈)라고 합니다. 대게 그 경전의 핵심이 되는 생각을 담고 있기 때문에 사구게의 뜻을 잘 이해하면 그 경전의 전체 뜻을 거의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 일 사구게로서 사구게 중의 사구게라고 하겠습니다. 바로 이 사구게는 영가를 천도할 때 읽는 시식문 안에도 나옵니다. 앞으로 이 『금강경』안에서 사구게들의 공덕을 여러 번 이야기하게 됩니다. 이 사구게의 뜻을 외워 두어야 경이 자신의 것으로 됩니다. 참고로 나머지 사구게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이 사구게;장엄정토분(葬嚴淨土分) 제10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以生其心)" 제 삼 사구게;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제26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 (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 (不能見如來) 제 사 사구게;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제32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부처님께서는 그동안 자신이 환하게 들여다 보고 깨달은 실상을 사구게로 나타내었습니다. "현실에서 겪는 모든 문제와 고통은 무엇으로 어떻게 해결할수 있는가. 그것은 진리를 알고 우주와 인생의 실상을 앎으로써 가능하다. 그렇다면 여래는 어떻게 하여 볼 수 있는가. 진리는 어떻게 하여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인생과 우주 삼라만상의 참모습을 아는 길은 무엇인가. 모든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다. 형상을 보되 진실한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곧 진리를 보고 여래를 본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虛忘)합니다. 우리 눈에 잡히는 사물 하나하나 모두가 허망할 뿐입니다. 귀중한 금이나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다고 하는 다이아몬드라 할지라도 결국은 허망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상(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은 공(空)인데 인연의 법칙에 의해 잠시 동안 형상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인연이 다 되어 버리면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지종지하는 우리들 육신도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옛노래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끌어 모아서 얽어매면 한 칸 모옥(茅屋) 풀어 흩으면 본래의 들판이어라. 턱없이 지(地).수(水).화(火).풍(風) 끌어 모아서 나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짓이여." 이처럼 우리의 육신도 본래는 텅 빈 것인데 연기(緣起)에 의해서 지.수.화.풍이 잠깐 결합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이 흩어지면 다시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망하고 무상하며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몸은 몇십년 후에 어차피 죽을 것인데. 죽을 바엔 지금 죽어 버리자'라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옳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연의 도리를 잘못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연의 도리를 아는사람은 인생을 알고, 인생의 도리를 아는 사람은 인연의 도리를 안다."라고 하겠습니다. 비단 여래를 보고 진리를 알고 세상의 사물과 우리들 자신을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세상살이에서 일어나는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밖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인 양 거기에 온 마음을 걸고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 속에는 이미 우리들 나름대로의 업과 인연에 의해 어떠한 견해가 자리잡아 하나의 형상으로 굳어져 진실을, 법을, 여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상(相)'이라고 거듭거듭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상이 불생불변의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상에서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눈에 비치고 생각으로 잡히는 형상을 '모든 것의 모든 것'이라 고 온갖 삶의 무게와 가치를 다 싣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금(金)으로 불상(佛傷)을 만들었을 때 부처의 모양을 보지 말고 금(金)자체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 금의 가치는 불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금(金)에 있습니다. 설사 그 금으로 돼지의 형상을 만들었어도 금의 값은 변함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돼지의 형상은 얼마든지 불상으로 변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불상이라는 형상도 얼마든지 돼지로 변할 수 있지만 금이라는 가치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금불상은 값진 것이고 금돼지는 무가치한 것이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相)에 걸려서 근본의 가치를 보지 못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좀 더 눈을 뜨고 보면 안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게 아니고, 있다고 하는 것이 있는게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만상(萬傷)을 이해하는 도리를 일깨워 주시는 것 입니다. 어떠한 형상을 형상이게 한 근본은 영원한 것이며, 불변의 것이지만 현재 눈앞에 보이고 생각으로 잡히는 것은 일체가 다 허망합니다. 허망한 것을 허망하게 볼 줄 알때 바로 그 자리에 여래가 나타납니다. 인연에 의해 잠시 결합되어 형상이 있는 것이지만 본래가 텅비었고 고정 불변한 근본이 있는 것이 아닌 것, 즉 만상(萬傷)너머에 있는 실상(實相)을 보는 것으로 우리들의 마음자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변덕스럽고 차별하는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근본마음, 본마음자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현상에 쫓아가서 한 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고 울긋불긋한 현상에 매여 너무나도 얄팍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부처님께서 보시고 너무나도 안타까워 모든 상 너머에 있는 여래를 찾으로 하신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존재를 존재 아닌 것으로 보아 만상이 다 무너졌을 때 그곳에 반야(般若)가 드러납니다. 반야는 바로 지혜이고 여래인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참된 나를 보고 너를 보며 부처님도 보고 온 우주의 참 모습이 드러나 비로소 깊이 있고 가치있는 인생길이 열립니다. 그리하여 지혜의 삶, 보살의 인생, 여래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한 말 같지만 우리의 인생, 삼라만상, 온 우주와 거기에서 벌어지는 사사건건을 시원하게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금강경』이 형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으로서 근본 취지, '무상위종(無相爲宗)'으로 삼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