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나눔의 쉼터/中要 6 經典集

금강경 강의 如法受持分 第 十三

靑 波 2003. 8. 6. 15:16
 
    如法受持分 第 十三 제13분 법답게 받아 지님 통일된 하나의 진리 덩어리 자체에 과연 나와 너, 남(男)과 여(女), 노(老)와 소(少), 승 (僧)과 속(俗), 선(善)과 악(惡)이라는 차별된 분별상이 붙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원만하고 구족하며 생사마저 떠나 보낸 그 자리를 밝혀내어 실상 그대로를 받 아 지녀야 합니다.법(法)답게 받아 지녀야 합니다. 언어와 문자가 붙지 못하고 우리의 사량분별(思量分別)이 미치지 못하는 그 자리를 굳이 말로 나타내자면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蜜經)'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딱히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아로새기는 그 마음이 바로 금강반야바라밀인 것입니다.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當何名此經이며 我等이 云何奉持하리잇고 이시 수보리 백불언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 운하봉지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是經은 名爲金剛般若波羅蜜이니 以是名字로 汝當奉持 하니라 불 고수보리 시경 명위금강반야바라밀 이시명자 여당봉지 그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이경은 금강반야바라밀 이니 이 이름으로써 너희들은 마땅히 받들어 지닐지니라." 부처님께서는 4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수기 설법(隨機 說法)을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어떠한 제목을 정해 놓고 목적에 맞게 설법을 하신 것이 아니라 중생들이 근기 와 필요에 맞추어 이야기 하다 보니 나중에 하나의 세계를 갖게 되고 통일된 사상이 확립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경전의 중간이나 말미가 되면 "경전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하고 제자들이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뒤 이상적멸분 제 14까지가 『금강경』의 상권입니다. 그래서 상권 바로 앞, 바로 여기에서 이 경의 이름을 묻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살펴 보았 지만 불교에서는 경전의 제목이 경전의 내용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동물을 만났을 때'대방광불화엄경'하고 세 번 축원해 주면 그 동물은 경의 제목만 듣고도 미혹한 축생의 탈을 벗고 제도된다고 하셨습니다.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며 날카롭고 빛나는 깨달음의 지혜로서 모든번뇌와 고통이 사라진 완전한 평화와 행복만이 있는 저 언덕에 이르는 가르침'으로 받들어 지니라는 것입니다.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佛說般若波羅蜜이 卽非般若波羅蜜일새 是名般若波羅蜜이니라 소이자하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그 까닭이 무엇인가. 수보리야,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부처님께서 금강반야바라밀로 받들으라고 하니 여기 금강반야바라밀에 집착을 합니다. 상을 떠나는 것이 『금강경』의 교훈인데, 금강경이라는 상만은 가져도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금강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 니고 단지 이름을 반야바라밀이라고 붙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이라고 아로새기는 마음이 진짜 반야바라밀이라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과, 사과...."하고 아무리 불러 봐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백 번 불러 보는 것보다 실제 사과가 진짜로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반야바라밀도 단지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야바라 밀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갇혀 있는 사람은 꼼짝달싹을 못하지만 견학간 사람은 이곳, 저 곳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구경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견학간 사람에게는 형무소에 간 것이 형무소에 간 것이 아니고 말이 형무소에 간 것입니다. 이처럼 반야바라밀은 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인 것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所說法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소설법부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如來가 無所說이니이다 수보리 백불언 세존 여래 무소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게 사뢰어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녹야원에서 교진여를 비롯한 다섯 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 신 후 49년간 하셨던 많고 많은 설법이 수보리의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라 는 말 한마디에 깡그리 부정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말 한마디에 오히려 부처님의 설법이 더욱 더 꽃을 피우고 설법의 가치가 참 답게 활짝 피어 납니다. 공(空)의 도리를 잘 이 해하는 수보리가 부처님의 진실을 더욱 빛나게 한 것입니다. 空生 수보리도 부처님 못지 않게 공(空)의 도리를 잘 나타내 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수보리가 좌선(坐禪)을 하고 있는데 공중에서 꽃비가 뿌려졌습니다. 그래서 수보리가 물었습니다. "꽃을 뿌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하늘의 제석(帝釋)입니다." "어찌하여 꽃을 흩으십니까?" "존자(尊子)께서 반야바라밀을 잘 설하시어 존중히 꽃 공양을 올립니다." "내가 무엇을 설하였단 말입니까?" "말씀 없으심이 참다운 설법입니다." 이렇게 제석천왕이 수보리를 실답게 칭송하였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이 是爲多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삼천대천세계소유미진 시위다부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하 須菩提야 諸微塵을 수보리 언 심다 세존 수보리 제미진 如來가 說非微塵일새 是名微塵이며 如來가 說世界도 非世界일새 是名世界니라 여래 설비미진 시명미진 여래 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삼천 대천 세계에 있는 미진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모든 미진을 여래가 설하되 미진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이며, 여래가 설한 세계도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니라." 지금까지는 부처님께서 이름지어 주신 『금강반야바라밀』의 경 이름과 부처님의 남김 없는 설법을 부정하였는데 여기에 와서는 우리들이 굳건하게 살아가는 터전인 이 세상을 다 털어 보이십니다.모여서 이루어낸 세계도 부정합니다. 지금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그려내는 갖가지의 상을 털어 내었는데 너무나도 확실하고 시작도 없이 있어 왔고 앞으로도 영원 불변토록 존재할 것 같은 이 우주 세게 라는 것도 결국에는 무상하고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見如來不아 不也니이다 수보리야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견여래부 불야 世尊하 不可以三十二相으로 得見如來니 何以故오 如來가 세존 불가이삼십이상 득견여래 하이고 여래 說三十二相이 卽是非相일새 是名三十二相이니이다 설삼십이상 즉시비상 시명삼십이상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냐.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고 그 이름이 삼십이상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태어나실 때 부터 거룩한 삼십이상(三十二相)을 지니셨습니다.이 삼십이 길상 (吉相)은 오백 생을 거듭하는 동안에 쌓은 선인(善因)에 대한 결과로서 얻게 되었습니다. 가슴에 만(卍)자가 있다.정상(頂上)에 육계(六繼)가 있다, 미간(眉間)에 백호(白毫)가 있다 등등의 거룩한 삼십이상 중에서도 가장 공덕이 큰 길상은 미간백호상이라고 합니다. 눈썹 사이에 흰 털이 하나 나서 오른쪽으로 말려 있는데 빛을 발하며 부드럽기가 도라면 (都羅綿) 같고 정결하기가 눈 같다고 합니다. 부처님 스스로 하는 부정보다 제자 수보리가 부처님의 형상을 부정하고 부처님께서 그것 을 인정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우리에게 상이 없음을 더욱 확인시켜 줍니다. 이것은 형상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저런 떠오르는 생각과도 구별됩니다. 여러 가지 상념들과 참 마음자리의 대비를 다른 경전에서는'객진 번뇌(客塵 煩腦)'라 하 였습니다. '나그네 번뇌'라는 뜻인데 길을 떠난 나그네가 여관에 들어 하룻밤을 묵었습 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그 나그네는 다음 행선지를 향해 떠나갑니다. 다른 떠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여관 주인입니다. 주인은 떠나지 않고 떠나지지도 않으며 떠날 수도 없습니다. 이 떠나야만 하는 나그네처럼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계속 동요하고 변하고 흘러가는 번 뇌 망상을 다 놓아 버려야만 합니다.여기에 인생을 걸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若有善男子善女人이 以恒河沙等身命으로 布施어든 수보리 약유선남자선여인 이항하사등신명 보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목숨으로 보시 했을 지라도"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명예와 재산과 학식을 다 이루어 간다고 하여도 자기 의 목숨을 잃게 되면 이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읍니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게 바로 우리의 목숨인 것입니다.목숨은 바로 이 우주와도 맞먹는 것입니다. 이토록 소중한 목숨이니 설사 한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서 보시했다고 해도 살신 성인이 라 하여 널리널리 칭송합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목숨을 항하에 있는 모래 수와 같이 수없이많은 목숨을 가지고서 보시 를 하였으니 그 때 돌아오는 공덕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마는 이것 역시도 언젠가는 다하 여 새어버릴 유루복이다 하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若復有人이於此經中에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甚多니라 약부유인 어차경중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 심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더 많으니라." "『금강경』은 금강경이 아니고 그 이름이 금강경이니라."하고 소흘하게 취급할까 봐 매우 강하게 비유를 합니다.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다는 것은 반야의 안목을 투철하게 갖추었을 때 없는 것이지 처음 부터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그렇다고 해서 또 금강경이라는 상을 지녀서는 안 되는 것이 고 말그대로 '취부득 사부득(取不得 捨不得)'입니다. 이 모든 것의 해결은 반야의 안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반야의 안목이 열리면 우리들의 진실한 모습을 참으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생 불멸(不生 不滅)의 불가사의한 힘이 넘쳐 나와서 나의 삶이 언제나 평화롭고 힘차 고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이 실상을 밝혀 주는 금강경이기에 참으로 금강경의 가치는 수승하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