離相寂滅分 第 十四
제14분 상을 떠나서 적멸함
상은 허망하고 무상하고 영원성이 없어 진실이 아닙니다.상을 떠난다는 것은 상에서 도피한다
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 무상항 상을 추월하여 꿰뚫어 보면 바로 그 자리에 영원토록 변치 않는
고요한 적멸의 자리가 있습니다. 일체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의 실상은 적멸할 뿐입니다.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바로 그 자리, 올라가지도 내려가지
도 않는 그 자리가 바로 실상의 자리입니다. 생기지 않으니 소멸해도 하나도 슬플 게 없고, 내
려 가지 않으니 올라가도 기뻐할 것이 없이 일체가 다 평등할 뿐입니다.
본래로 기뻐하거나 슬퍼할 것이 없는 텅 빈 그 곳이야말로 진정으로 즐거운 자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고 했습니다.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이라는 역대 부처님의 게송을 듣기 위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시절 즉 설산 동자였을때 야차에게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경전에 있습니다.
그만큼 이 게송에 부처님의 진리가 오롯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爾時에 須菩提가 聞說是經하사옵고 深解義趣하야 涕淚悲泣하사 而白佛言하사대
이시 수보리 문설시경 심해의취 체루비읍 이백불언
希有世尊하 佛說如是甚深經典은 我從昔來所得慧眼으로 未曾得聞如是之經호이다
희유세존 불설여시심심경전 아종석래소득혜안 미증득문여시지경
그때에 수보리가 이 경 설하심을 듣고 깊이 그 뜻을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
님게 사뢰었다."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게서 이렇게 심히 깊은 경전을 설하심은
제가 예로붙 얻은 바 혜안으로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은 얻어 듣지 못하였습니다.
오랫 동안 철학과 종교 교리를 다 섭렵하여 학덕이 높고 연세도 많아 장로로 추앙받는 수보리
가 너무나도 감동을 받아 울기까지 합니다.
그동안 눈에 보이는 현상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얄팍한 삶을 살았는데 이처럼 간단명료하고 시
원한 실상의 가르침을 받아 참 모양에 눈을 뜨게 되어 점잖은 수보리가 희유하다고 하며 눈물
을 보이는 것입니다.
기도 성취 아주 간단합니다. 절실하게 울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울어 보지도 않고
소원 성취가 안 된다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世尊하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고 信心淸淨하면 則生實相하리니
세존 약부유인 득문시경 신심청정 즉생실상
當知是人은 成就第一希有功德이니
당지시인 성취제일희유공덕
"세존이시여,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을 깨달으니,
마땅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임을 알겠습니다."
수보리는 과거에 사제(四諦), 십이인연(十二因緣)의 복잡한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도리를
다 섭렴한 후에 얻어 듣게 된 시원한 『금강경』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수보리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이 금강경의 도리를 알아차려 믿는 마음이 훌륭하게 용솟음친
다면 그 사람은 곧 진실한 모습을 보게 되는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게 됩
니다.
이렇게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과는 다른 삶의 가치가 확연하게 거듭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世尊하 是實相者는 則是非相일새 是故로 如來說名實相이니이다
세존 시실상자 즉시비상 시고 여래설명실상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란 곧 이 상이 아님이니, 이 까닭에 여래께서 실상이란 말씀하셨다."
이 경을 설하는 자리에 부처님과 수보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많은 대중이 함께하였습니다.
함께한 많은 대중이 이 자리에서 실상을 낸다고 하니 또 실상이라는 상을 그릴까 봐 그 이름이
실상이다 라고 하여 실상에 대한 의식이나 감각까지도 또 날려 버립니다. 그래서 마음에 실상
이란 것을 얻었다는 바가 있으면 실상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世尊하 我今得聞如是經典하고 信解受持는 不足爲難이어니와
세존 아금득문여시경전 신해수지 부족위난
若當來世後五百歲에 其有衆生이 得聞是經하고 信解受持하면 是人은 則爲第一希有니
약당래세후오백세 기유중생 득문시경 신해수지 시인 즉위제일희유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어 알고 받아지니기는 족히 어렵지 않
거니와 만약 오는 세상 후 오백세에 그 어떤 중생이 이 경을 얻어 듣고서 믿어 알고 받아 지닌
다면,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함이 되겠습니다.
마지막 오백세, 즉 요즈음 시대에도 이 도리를 얻어 제대로 이해하고 믿고 자기 것으로 하여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제일가는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각 방면으로 지식이 발달해지므로 각종주의 주장이나 교설이 많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何以故오 此人은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하이고 차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無壽者相이니 所以者何오 我相이 卽是非相이며 人相衆生相壽者相이
무주자상 소이지하 아상 즉시비상 인상중생상수자상
卽是非相이라 何以故오 離一切諸相 則名諸佛이니이다
즉시비상 하이고 이일체제상 즉명제불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자상도 없기 때문입
니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아상은 곧 이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 수자상도 곧 이 상이 아니
기 때문입니다.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자존심, 남이라는 차별 의식, 못났다는 열등 의식, 나이에 사로잡힌 한계의식은 실상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합니다.현실에 발판을 딛고 살아가면서 우리 불자들이 수자상 하나만 떼어
버려도 우리들의 삶의 양이 훨신 많아지고 넓어집니다.
이제부터 정말 내 인생을 살겠다 하는 각오로 다시 청년으로 돌아가 열심히 뭔가를 배우고 가슴
속을 열의로 채워 보십시오. 몇 곱절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육체의 연령은 육십대이므로 육십대의 인생은 당연히 사는 것이 아니고, 정신은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로 폭넓게 넘나들 수 있으니 몇 배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니 '이 나이에 무엇을 하겠느냐'하고 제한적인 생각을 하기 쉽지만, 참
생명은 나이를 먹는 게 아닙니다.그러므로 나이가 없음을 거듭 강조 하겠습니다.
나이가 없으므로 수자상이 날 리가 없습니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무불무중생(無佛無衆生)'인 그 자리에 또 '나다', '너다'하는 차별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사실 '나다', 너다'하는 집착에서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석해 들어가면 아무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장 율사가 문수보살을 뵙고 싶어서 오대산에서 정성들여 일보 일배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 노인이 와서는 "자장이 있나. 자장이 있나."하고 산문
밖에서 큰 소리로 불러 대었습니다.
시자가 아무리 말려도 "나는 꼭 자장을 한 번 보고 가겠다."하길래 자장 스님에게 가서 물어
보았더니 자장 스님도 "쫓아 버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노인은 "자장이 그런 말을 했다면 할 수 없지."하며 망태기에서 썩은 개를
꺼내 허공으로 던지니 그 개가 사자로 변하고 그 노인은 문수보살이 되어 사자를 타고날아갔
습니다.
시자의 말을 전해 들은 자장 스님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달려갔지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는 이야기가 있습니다.결국 자장 스님은 문수보살을 보지 못했습니다.왜냐하면 문수보살이
라는 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우리들은 상을 떼어 버려야 제대로 된 보살행이 나옵니다.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如是如是하다
불 고수보리 여시여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렇다. 그렇다." 점잖은 장로 수보리가 감동을 참을 길 없
어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자 부처님께서도 "수보리 네말이 정말
내 말과 생각을 잘 드러내었다."하시며 거듭하여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시간과 온 우주 공간에 편재(遍在)된 진실을, 그리하여 우리들이 세세생생 먹고 의지하
여 살아갈 수 있는 넘치는 힘을 펼쳐 주시는 것입니다.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고 不驚不怖不畏하면 當知是人은 甚爲希有니
약부유인 득문시경 불경불포불외 당지시인 심위희유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래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심히 희유함이 되는니라."
우리들은 마음 속에 부처님은 상당한 위신력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큰 신통력이 있고 대자비와 지혜가 우리들 중생과 다르게 구족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
합니다. 그러나 이 『금강경』에서는 부처님을 그렇게 나타내지 않습니다. 간단합니다.
단지 허망하고 변화무상한 상을 떠나는 것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즉, '이일체상 즉명제불
(離一切相 卽名諸佛)'인 것입니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來가 設第一波羅蜜이 卽 非第一波羅蜜일새 是名第一波羅蜜이니라
하이고 수보리 여래 설제일바라밀 즉 비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님일새 그이름이 제
일바라밀이니라." 보통 제일바라밀을 보시바라밀로 보지만 『금강경』에서는 지혜바라밀로
생각합니다. 만상을 떠나 보내고 우리의 진실자리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금강석과 같이 견고
하며 날카로운 반야 지혜인 것입니다.
須菩提야 忍辱波羅蜜도 如來가 說非忍辱波羅蜜이니 是名忍辱波羅蜜이니라
수보리 인욕바라밀 여래 설비인욕바라밀 시명인욕바라밀
"수보리야, 인욕바라밀도 여래가 설하되 인욕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니라."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라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환경이나 금욕스러운 상황을 끝까지 참아
냄으로써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수행입니다. 다른 바라밀도 있지마는 상을 떠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인욕이라는 것이 중요한 방편으로 대두됩니다.
참아낼 대상도 기뻐할 대상도 성낼 대상도 그 어떤 것도 없게 됩니다.
우리들의 고통을 초월하였으므로 실제로 참을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욕바라밀은 인욕
바라밀이 아닌 것이고 단지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인 것입니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我昔爲歌利王에게 割截身體하야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앙 할절신체
我於爾時에 無我相함 無人相 하여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호라
아이어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주자상
何以故오 須菩提야 我於往昔節節支解時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면 應生嗔恨일러니라
하이고 수보리 아어왕석절절지해시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응생진한
"어찌한 까닭인가. 수보리야, 내가 옛적 가리왕에게 신체를 낱낱이 베일 때에 나는 그때에 아
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내가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를 베일 때에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함을
내었으리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초월하여 텅 비어 있는 상태에서 누구를 원망하고 무엇에 대하여
성을 낼 수 있겠습니까.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라고 할 수 없는 그 경지를 부처님께서는
전세(前世)에 겪었던 실제를 예로 들려 주십니다.
가만 있는 사람을 약간만 건드려도 신경질 부터 내는게 게 보통 우리들 수준인데 그토록마디
마디 살점을 올내고 뼈를 갈라놓은아픔을 당하면서 도 아무런 진한(瞋恨)을 내지 않는다는 것
은 단순히 '나는 수행자다. 수행자니 이 정도는 참아야지'하는 수준의 인욕은 아닐 것입니다.
나와 너를 공(空)으로 보았기 때문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四相)에서 떠나 있으므
로 이미 고(苦)의 상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고통도, 원망할 가리왕도, 심지어는
고마워할 제석천도 없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又念過去於五百世에 作忍辱仙人하야 於爾所世에
수보리 우념과거어오백세 작인욕선인 어이소세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호라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수보리야, 또 과거 오백세 동안에 인욕선인이었던 일을 생각하니 그때의 세상에서도 아상이
없었으며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으며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부처님께서는 과거 오백생 동안에 수행한 인욕을 다 반야의 광명에 비추어 들려 주십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순교자 이차돈도 자기 자신을 불생 불멸의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한 점 주저
없이 불법을 위해 자신이 생명을 보시할 수있었다고 봅니다.
是故로 須菩提야 菩薩이 應離一切相하고 發阿縟多羅三藐三菩提이니
시고 수보리 보살 응리일체상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일체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 보리심을 낼지니" 보리심
은 모든 상을 떠나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상식과 지식, 상념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때 깨달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온갖 시비선악의 판단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진실한 자기를 볼 수 있습니다.
참선 일념(參禪 一念)에 들면 그 동안 우리들 마음 속에 누적 되어 있는 온갖 기준과 법도, 지식
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깊고 깊은 마음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잊어버리거나 떼어내어 날려 버려서 벗어난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속에는 본래로 온갖 사
변에서 떠나 있는 공적한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 참선입니다.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生無所住心이니라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생무소주심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도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 머문 바 없는 그 마음을 낼지니라."
앞에서 "일체상(一切相)을 다 떠나라."라고 했던 것을하나라나 분석하여 일러 주십니다.
사실 나라고 하는 것은 안이비설신의를 통해 인식되어지는색성향미촉법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물, 소리, 향기, 맛, 감촉, 법의 이 여섯 가지에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물을 인식하여 분별을 짓고눈으로 보고 소리를 들으며 냄새를 맡고 감촉을 느끼
며 사는세계는사실 거대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식을 축적해가고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하며심지어 저 높은 하늘나라
도솔천 내원궁을 아는 법의 세계도굉장히 큰 세계입니다.
若心有住면 則爲非住니 是故로 佛說菩薩은 心不應住色布施라하나니라
약심유주 즉위비주 시고 불설보살 심불응주색보시
"만약 마음에 머묾이 있으면 곧 머묾 아님이 되느니라."그러므로 부처님이 말하기를,
"보살은 마당히 마음을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하느니라
우리들이 그 어디와도 연관을 맺지 않고 살아가기란 사실 참으로 어렵습니다.
태어나면서 한 가정의 일원이 되고 자라면서 점점 더 많은 세계에 속해지면서 사회적인 자아
(自我)가 확대되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菩薩이 爲利益一切衆生하야 應如是布施니
수보리 보살 위이익일체중생 응여시보시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느니."
불교에 뜻을 같이 하여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일체의 삶을 펼쳐야 합니다. 어디 소소한 데에 구애되어 좀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크고
시원하게 인생을 꾸려가야 합니다.
재보시(財布施)를 담당할 능력이 있으면 재보시에 힘쓰고, 법보시(法布施)를 담당할 능력이
되면 법보시를 힘껏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여의치 못하지만 시간이 충분하고 건강한
몸이 있다면 그것으로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 불자들도 남을 향한 자비심의 발로로 자신의 육체의 일부를 기증하는 것은 참
으로 장려할 일이라 생각됩니다.
如來가 說一切諸相이 卽是非相이며 又說一切衆生이 卽非衆生이니라
여래 설일체제상 즉시비상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여래가 설한 일체의 모든 상은 곧 이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의 중생이라고 설함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아상, 중생상, 수자상은 변화무상하고 필경은 무너질 것이므로, 즉 실상
이 아니므로 이 상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하여 깨달은 부처님이 갖고 있는
마음이나 중생들이 갖고 있는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마음이란 본래로 무차별하고 동일한 것
이기 때문입니다.
須菩提야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如語者며不광語者며 不異語者시니라
수보리 여래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자며 실다운 말을 하는 자며 사실과 같이 말하는 자며
거짓이 아닌 말을 하는 자며 다르지 않은 말을하는 자니라."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줄 때에는 현명하게 판단하여 적절한 충고를 해 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상황이라도 그것이 내 문제로 다가오면 그만 속수무책이 됩니다.
그이유는 간단합니다. 내 욕심에 가려 집착했으므로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스운 예로 장기나 바둑을 둘 때 옆에서 그 대국을 지켜 보게되면 자기의 평소 실력보다
이급 정도 높게 수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합니다.
須菩提야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 무실무허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법인 이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느니라."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하는 이 법의 본질은 모든 사변으로부터 떠나있고,본래가 공적한 자리
입니다. 그러니 실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없다는 가운데에서도 쓰고, 쓰고도 마침이 없는 묘한 작용이 일어나니 과연 헛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본래가 적적하여 상을 가질 수 없으니 실다움도 없고, 또 그러면서도
이렇게 끊임없이 만상이 흘러나오고 과거에 계속 자아내었고 앞으로도 마음껏 쓰고도 다함이
없을 것이니 헛되지도 않는것입니다.
須菩提야 若菩薩이 心住於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入暗에 則無所見이요
수보리 약보살 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 입암 즉무소견
若菩薩이 心不住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有目하야 日光明照에 見種種色이니라
약보살 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 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러서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매
아무 것도 보이는 바가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눈도 있고 햇빛도 밝게 비쳐서 여러 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14분 까지가 『금강경』의 상권(上券)입니다.금강경의 주된 사상이 14분 까지에서 거의가 다
설해집니다.특히 이 부분은『금강경』전체의 결론이라고 보아지기 때문에 평소에 갖고 있는
생각을 힘주어 설명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둠'과 '밝음'을 가지고 살짝 대비시켜 놓았지만,
여기에는 매우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눈에 보이는 현상과 우리들 의식 속에 존재하는 법에 머물러 살아
가는 것은 어떤 사람이 캄캄한 곳에 들어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가슴 아팠던 그어떤 것도 결국은 내가 잘못 생각하여 그런것이지 상대가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설사 상대가 백 퍼샌트를 잘못 하여 내가 상처 받았다 하더라도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는냐 하는 바른 자세가 되어 있다면 상처가 상처일 수 없습니다.
참다운 반야지(般若智)로서 '오관(五官)으로 판단되는 나'를 초월해 보면 천 개의 태양이 한
꺼번에 떠오르는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우리들 속에 있는데 조그만 현상에 매달려
상처 받고 살아갈 필요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평생 이 문제를 가지고서 이야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들의 눈이 환히 밝고 거기에다 햇빛까지 더없이 밝게 비추어 주니 사물사물이 학연히 드
러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이아몬드인지 돌덩이인지 흙덩이인지 확연히 분별할 수 있으니
창고에 들어가서 값진 다이아몬드만 들고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사리불과 목련존자는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들었습니다.
포살할 때 사리불과 목건련의 자리에 당겨 앉아야 하는데 다른 제자들이 너무 마음이 아파
감히 당겨 앉지를 못합니다. 부처님을 모시기 전부터 사리불과 목건련에게서 가르침을 받았
기 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사리불이 열반에 들었을 때에도, 목련존자가 열반에 들었을 때에도 반복하
여 법문을 주십니다.
"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을지언정 다른 것을 등불로 삼지 말라."
어찌보면 냉정한 말씀 같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연기의 법칙인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단
십 미터도 자유로이 갈 수가 없고 밝은 곳에서는 갖가지 사물을 즐기면서 어디든지 얼마든지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이 속에는 이렇게도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當來之世에 若有善男子善女人이 能於此經에 受持讀誦하면
수보리 당래지세 약유선남자선여인 능어차경 수지독송
則爲如來가 以佛智慧로 悉知是人이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하리라
즉위여래 이불지혜 실지시인 실견시인 개득성취무량무변공덕
"수보리야, 오는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서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아서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
취하게 하리라."
선재(善財)동자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오십삼 선지식을 친견하는 끝없는 구도의 길에 오릅
니다. 갖은 고생을 하며 마지막 처소인 미륵보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륵보살이 손가락을 튕기는 작은 소리에 그동안 낱낱의 처소에서 정진한 깨달음을
모조리 다 잊게 되는 것입니다. 선재동자는 낙담을 하며 미륵보살에게 묻습니다.
"미륵보살이시여, 저는 지금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다시 시작하는 수 밖에 더 있겠느냐.
다시 처음부터 문수보살을 만나고 차례차례 오십삼 선지식을 다시 밟아 올 수 밖에 더 있겠
느냐." 라는 기가 막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 같으면 포기하고 말 일입니다. 그런데 선재동자는 그 말을 듣고 조금도 낙망하거나
게으른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다시 그 먼 일백 육십 유순을 돌아가 문수보살을 향해 걸음을
내디딥니다.
문수보살이 그것을 보고 오른손을 뻗어 선재동자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축복을 내려 줍니다.
"선재 선재라, 네가 어찌 그 순간에 싫어하지 아니하고 싫증내지 아니하고 해태(懈怠)하지
아니하고 그 길고 먼 과정을 다시 밟으려고 하는가?" 하는 거룩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반야바라밀행자(般若波羅密行者)의 도리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불교를 믿고 공부한 보람으로 한량없고 참다운 공덕(功德)을 얻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금강경은 삶에 대한 참된 지혜가 구절구절마다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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