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靑波 海外 旅行記/中國 볼만한 곳

북경 6. 이화원

靑 波 2007. 7. 3. 08:16

 

이화원( 和園)주위 8km. 인공호인 쿤밍호(昆明湖)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흙을 쌓아올려 만든 완서우산
(萬壽山)이 북부에 있고 모든 건축물은 산 남쪽에 집중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통칭 천간낭하(千間廊下)라고
불리는 장랑(長廊)이 눈길을 끈다.
12세기 금나라 때 지은 작은 궁전을 시초로 명조(明朝) 중엽에 만들어졌으며, 청조(淸朝)의 건륭제(乾隆帝)
가 많은 전각(殿閣)을 세우고 정원을 꾸몄다. 서태후(西太后)가 살았던 여름 별궁으로서 유명하다.
 
1860년 톈진(天津) 조약의 비준을 강요하는 영국·프랑스 연합군 8만이 베이징 서쪽교외의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웠을 때 이곳도 화재를 입었다. 1894년 서태후는 환갑축하연을 베풀기 위해 해군증강용으로 영국에서
차용한 돈까지 개축을 위해 쓰게 돼 이것이 청.일전쟁(淸日戰爭)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베이징 최고의 관광명소로 물에 떠 있는듯한 석주(石舟)와 석교(石橋), 해당화. 난초. 수양버들 색채가
선명한 건축물과 장랑(長廊) 등이 경관의 조화를 이룬다.  1998년 국제연합 교육과학 문화기구(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서태후가 여름 철 정사를 보았다는 인수전 앞뜰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

보다 황후를 상징하는 학을 가운데 자리에 세워두었다.


 

 


 
이날따라 안개가 끼어 먼 곳은 선명하게 보이질 않았다.

아래 사진은 3년전 겨울에 찍은 것인데 아쉬워 한장 올려보았다..

 

 



 

이화원에도 자금성 후원에서 보던 백송이 있었.
 
백송이 있는 작은마당, 광서황제가 서태후를 페위시키려다 발각된 후로는
 자금성에 갇혀있다 여름이면  서태후가 이 곳 이화원에 대려다,
감금시켜놓았다는 앞 쪽 이외에는 창문조차 없는 곳이다.

 
서태후가 소나무가 용처럼 생겼다고 꼭대기를 자른 소나무.


 

  


 

 

 


  
        이화원과 서태후  
서태후(1835~1908)의 출생설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데. 일설에는 서태후의 유년시절의 이름은 왕소겸, 
산시성 가난한 한인 농가의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 팔려가다시피 북경으로 왔었고,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을 
하다가 만주족 귀족 가문인 예흐나라 가문의 입양되어졌다.
16세 궁궐의 수녀(궁녀)로 발탁이 되어 황궁으로 들어가 1년이 되도록 황제의 용안조차 보지 못한 서태후는 
황제의 내관에게 뇌물을 주어 황제가 이수원에 행차할 적에 자신을 불러주도록 유도를 했다. 
그 날 이귀비는 출산을 하는 과정에서 딸을 사산하여 시름에 잠긴 청 7대 함풍황제 앞에 서태후는 산시성 민
요를 불렀는데 이 노래 소리를 들은 황제가 친히 서태후를 불렀고,  그 후부터 그녀는 수녀에서 귀인 직급을 
부여받았다.
청나라의 후궁제도는 황귀비-귀비-비-빈-귀인... 등 순서로 돠어있다.
함풍황제에게는 황후와 이귀비 외에도 후궁들이 여럿 있었지만 이들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다,  서태후가 
아들을 낳으니 기쁨에 함풍황제는 아들을 태자에 책봉하고 서태후의 직위를 의비로, 후에 그녀를 황귀비로
 봉했다. 예쁜 편은 아닌 서태후는 그 후 함풍황제와 함께 잠자리를 드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함풍황제는 임종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은밀히 황후 자안태후(동태후)를 불러 평소 서태후 야심을 잘 알고 
있는터라 옥쇄와 직접 쓴 편지를 전했다.  
"내가 죽거든 태자의 생모를 변방으로 귀양 보낸 즉시 사약을 받게 하여 죽게하라." 
평소에도 마음 약하고, 정이 많았던 동태후는 어린 황제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라 하여 함풍황제의 유교를 
따르지 않게 되었다
1861년 30세로 함풍황제가 서거를 하고, 서태후 6세 아들이 동치황제로 등극한다.
동치황제가 진짜 함풍황제의 자식인지는 알 길이 없다. 수녀로 입궁을 할 당시 서태후에게는 애인이 있어, 
그가 죽자 수녀로 간택이 되어 들어왔기 때문에 동치황제가 진짜 함풍황제의 핏줄인지는 의심 가는 일이다.
6세의 어린 황제를 대신해 두 태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모든 정무는 서태후 혼자 도맡아 하고,   자안 태후
(동태후)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모든 정무를 황제와 자희태후(서태후)에게 맡기고 마지막에 검열하는 일만 했다.
어린 황제를 데리고 두 태후와 문무백관들이 함풍황제의 사당으로 제를 올리러 가서 서태후는 동태후보다 한
발 앞서서 위패에 절을 했다. 심기가 불편해진 동태후는 평소 인자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화를내며
 "감히 선황의 황귀비였던 주제에 정식황후인 나를 능가하려 하다니 방자하구나.   썩 한 발 뒤로 물러나지 못
하겠느냐?" 궁녀들과 내관, 문무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크게 당한 서태후는 동태후를 바라보며 훗날 이
 빚은 꼭 갚아주겠다고 이를 갈았다. 
동치황제 18세에 혼인을 하는데, 두 태후가 신부감을 따로 선별했다. 동치황제는 평소 친어머니 이상으로 따
스함을 느끼던 동태후 쪽이 주선한 신부를 황후로 맞아들이고, 생모인 서태후가 주선한 신부에게 '혜비'라는 
후궁의 직급을 주었다. 
하루는 동태후의 건강이 좋지 않아 몸져눕게 되었는데 서태후는 이것이 기회다 싶어 자신의 궁녀와  짜고 동
태후를 위하는 척 약사발을 들고 동태후 침실로 향했다. 
인자한 동태후는 자신을 찾아준 서태후를 반갑게 맞이했는데 서태후는 자신이 직접 다린 약이라 하며 약사발
을 올리고, 서태후는 졸도를 하며 쓰러지자, 동태후가 놀라무슨일이냐 하고 묻자 서태후의 궁녀가 
"우리마마께서 마마의 탕재를 손수 지으시다 의원의 말에 사람의 피를 넣어 다리는 것이 효험이 더 크다하여 
그 방법을 시행하시다가 그만..." 라고 말하자 동태후는 그 말에 감동을 했다.
그 후 동태후는 서태후를 불러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준 공으로 소원이 있으면 말해라 했더니, 서태후는 동태후
가 가지고 있는 선황의 유언장을 자신에게 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크게 고민을 하던   동태후는 이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황의 옥쇄가 찍힌 유언장을 주게 되었고,   그것을 받은 서태후는 받은  즉시 불로   태워버리고
 말았다.
선황의 유언이 없으니 자신을 폐하고 싶어도 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서태후는 그 때부터 전과 마
찬가지로 동태후를 오만하게 대했는데,  이미 선황의 유언이 담긴 서찰을 태워버렸으니 그녀를 폐할 수 없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태후는 궁녀를 시켜 떡을 동태후에게 보냈는데 동태후는 그 떡을 아무 의심없이 받아먹고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서태후가 떡에 독을 넣어 동태후를 독살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다만 추측일 뿐이다.
몹쓸병으로 동치황제가 19세 나이에 죽자 서태후는 자신의 여동생 아들인 3살된 재첨을 광서황제로 옹립한다. 
광서황제는 서태후 때문에 제대로 정치도 못해 본 황제이다.
서태후의 폭정은 계속되어, 그 녀의 하루 식탁은 농민 4만 명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고 전해진
다.   그 밖에 젊음을 유지하게 위해 젖이 나오는 여성들의 젖을 빨아 먹었다든지, 머리를 빗을 때 머리카락이 
빠져 나오는 것을 참지못해 머리를 빗던 궁녀를 때려 죽였다든지, 비단 옷만 해도 2000벌이 넘었으며 금은 보
화는 물론이고, 외국에서 받은 뇌물만 해도 수백 억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광서황제는 더이상 계속되는 서태후의 폭정에 시달리다 못해 결국 서태후를 폐후시 킬 것을 캉유웨이들과 은
밀히 시행하려다 되려 서태후에게 뒤통수를 맞아 궁중에 유폐되었다.
광서황제의 후궁 중 진비(珍妃)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은 언술이 뛰어나고 아름다워 광서황제가 총애
하는 후궁이였는데, 태후는 진비를 평소에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진비 역시도 광서황제가 서태후의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한 황제로 탈바꿈 할 수 있도록 주선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구 8개 연합국이 자금성을 칩입하여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때 서태후는 광서황제 황후와 궁
녀와 내관 2000명을 데리고 시안(西安)으로 피난가려고 하자 광서황제의 후궁들은 울면서 데려가 달라고 했지
만 서태후는 "너희들까지 가면 산시성까지 가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너희들은 여기 남으라"라고 명령한다.
그 때 진비는 서태후의 발목을 잡고 "죽어도 폐하 곁에서 죽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서태후는 진비의 머리
채를 잡고 우물로 끌고가 빠뜨려 죽였다. 
지금도 자금성에는 '진비정(珍妃井)'이라는 세겨진 진비가 살해당한 우물이 있다. 
1901년 연합국과 화친이 성립돼 북경으로 다시 오게 되었는데, 진비를 잃고 상심한 광서황제는 서태후로부터 
유폐생활을 끊임 없이 당하다 1908년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광서황제가 죽는날 저녁에, 마지막 황제 애신각라 
부의를 즉위케 해놓고, 이튿 날 악명 높은 서태후도 나이 76세 나이로 죽었다. 죽기 전 유언으로 
"앞으로 절대 여자가 정사를 농락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  이화원 하면 서태후가 떠 올라 지난번 여행에서 들은 기억을 살려, 네이브 지식인에서 발췌했습니다. *
                                         2007년 7월 3일  靑 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