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나눔의 쉼터/中要 6 經典集

아함경 15. 열반(涅槃)

靑 波 2002. 12. 25. 07:40
    15. 열반(涅槃) "사리푸타(舍利弗)여, '열반, 열반' 하고 말하지만, 대체 열반이란 무엇 인가?"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멸,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것을 일컬어 열반이라 한다." "그렇다면 벗이여, 그 열반을 실현할 방법이 있는가? 거기로 갈 길이 있 는가?" "벗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야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즉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相應部經典] 38:1 浬槃) 상응부경전 이반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실천하여 불교인이 기어이 실현코자 하는 이상 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열반(nibbana)이라 일컬어지는 경지이다. 이상의 경지는 사람과 종교에 따라 각기 다르다. 죽어서 천국에 태어난다 든지, 제천(諸天: 여러 신)이 있는 곳에 왕생한다든지 하는 것을 이상으로 그리는 종교도 있다. 또 현세에서의 번영이나 행복을 궁극의 소망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런 중에서 열반을 인간의 이상으로 여기는 불교의 사고 방식은 반드시 그 유례가 전무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 시대의 인도에 그리 보편 화되어 있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경([중부 경전] 72 파차구다화유경. 한역 동본, [잡아함경] 34:24 견) 에 의하면, 붓다는 바차(婆蹉)라는 외도의 방문을 받아 다음과 같은 문답 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먼저 그 외도는 여러 가지 형이상학 적인 문제에 대해 붓다의 소견을 물었고, 붓다는 그런 문제가 해탈,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견해 표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차는 문제를 바꾸 어 그 해탈, 열반에 대해 따지고 들었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그 해탈한 사람은 어디에 가서 태어나는 것입니까?" "바차여, 그것은 어디에 가서 태어난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에도 안 간다는 것입니까?" "가서 태어난다든지, 태어나지 않는다든지 하는 그런 것과는 다르다." 그는 열반에 대해 물었던 것이지만, 그 착안점이 전혀 빗나가 있었기 때문 에 토론 자체가 성립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 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붓다 쪽에서 그에게 질문을 던져 그의 생각 을 유도해 갔다. 경전의 이런 서술로 보아도, 이 열반이라는 개념은 그 당 시의 인도에서는 아직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개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바차여,그대가 알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가르침은 심히 깊 고,알기 어렵고, 미묘하여, 지혜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 다른 사상 을 따르는 이나 다른 실천 법을 닦는 이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다시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 바차여, 만약 여기 에 불이 타고 있다 할 때, 그대는 그것을 불이 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물론 바차는 알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바차가 아니더라도 이런 대답밖에는 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자 붓다의 이상한 질문은 다시 이어졌다. "바차여, 그러면 그 불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대 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것은 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바차여, 그 불이 다 타고 꺼졌을 때, 그 불은 어디 로 갔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려는가?" "대덕이시여, 그것은 적당한 물음이 아닙니다. 그 불은 나무가 있었으므 로 탔던 것이요, 이제는 나무가 없어졌기에 꺼진 것입니다." 이 이상스런 문답으로 붓다는 열반을 설명해 갈 터전을 닦았던 것이다.그 래서 붓다는 순순히 이런 말씀으로 타일렀다. "이 인생은 괴로움으로 차있다. 그리고 그것은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사람이 어리석어서 격정의 희롱하는 바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격정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격 정이 없어지고 보면 불안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것도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훨훨 타오르던 불도 그 땔감이 다하고 나면 꺼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을 나는 열반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난 바차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로부터 일생을 통해 충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어쨌든 여기에 전개된 문 답은 불교의 이상인 열반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더욱 이 거기에 사용된 비유는 단순한 비유로만은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열반의 개 념에 밀착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열반이란 그 원어(Pali, nibbana ; Skt.,nirvana)의 뜻을 캐어 볼 때 '불이 꺼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술어를 붓다는 어디로부터 가져왔던 것일까? 이런 문제를 캐기란 쉽지 않겠지만, 요컨대 그 출처는 붓다의 사상 자체에 있었던 것이라고나 해야 될 것 같다. 초기에 속하는 붓다의 설법 중에 '연소'라는 제목으로 전해지는 경이 있다. 유럽의 불교 학자들은 이것을 예수의 '산상 수훈'에 비교하여 '산상 설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붓다가 전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바라나시의 교외에 있는 이시파타나 미가다야(鹿野苑)로부터 다시 마가다 국의 우루베 라 -정각한 곳- 로 돌아온 붓다는 거기서 많은 제자를 얻었다. 그 수효는 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그 제자들을 이끌고 붓다는 다시 그 나라 의 수도인 라자가하(王舍城)로 떠나갔던 것이지만,그 출발에 즈음하여 그는 제자들과 함께 가야시사(象頭山)에 올라간 일이 있다. 산상에 올라서 바라보매, 추억 많은 땅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동북쪽으로는 아득히 가야(伽耶)의 거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동쪽에서 흐르는 것은 네란 자라 강임에 틀림없었다. 다시 그것을 따라 멀리 남녘으로 눈을 옮기니 정각을 성취했던 고장이 보였 다. 이 장한 조망을 발아래 놓고 붓다는 새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타고 있느니라. 활활 타오르고 있느니라. 먼저 이 사실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뜻인가? 비구들이여, 눈이 타 고 있다. 마음도 타고 있다. 모두 그 대상을 향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것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는 것이랴. 탐욕의 불꽃에 의해 타고. 노여움의 불꽃에 의해, 어리석음의 불꽃에 의해 타고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