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나눔의 쉼터/中要 6 經典集

아함경 14. 나도 밭을 간 다. 2

靑 波 2002. 12. 19. 07:40
    나도 밭을 간 다. 그런 인간 개간의 일을 하자면 먼저 지혜의 보습으로 갈아야 한다. 즉 인간의 무지몽매함을 제거하는 일이다. 거기에는 미망이 있고, 탐욕이 있고, 성냄이 있고, 전도가 있다.그리고 잔인성이 있고, 극단을 즐기는 버 릇이 있다. 붓다의 설법이야말로 이런 황무지를 지혜의 모습 으로 가는 일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경전([상응부 경전] 42:1 포악. 한역 [잡아함경] 32:6 악성)은 붓다가 어떤 촌장을 교화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 사나이는 마을에서도 매우 소문이 나쁜 사람이었으며, 그것을 스스로 걱정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던 것이다. "대덕이시여, 사람들은 나를 '포악하다, 포악하다.' 말하고 있습니다. 체 무슨 까닭에 그리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세상에는 같은 인간이면서도 '얌 전하다.'는 평을 듣는 사람도 있거니와, 대체 어떤 이유로 그런 사람은 그 런 말을 듣는 것이겠습니까?" 붓다는 거친 그 사람을 자비에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씀했다. "촌장이여, 여기에 탐욕을 지닌 사람이 있다 하자. 그는 탐욕 때문에 남의 노여움을 사야 하며, 남이 노하는 것을 보면 그도 또한 노하게 되리라. 이 렇게 되면 그 사람은 '포악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 아니냐? 또 여기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증오심에 불타고 있다고 치자.그는 증 오심 때문에 다른 사람의 노여움을 살 것이며, 다른 사람이 노하는 것을 보면 그도 또한 노하리라.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포악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 아니냐? 이런 논리의 전개는 붓다의 독특한 설명 방식이다. 간명하다고 하기보다 는 좀 지루한 느낌이 없지 않다. 분석적이어서 단계에 따라 끌어올리는 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명에 덮여 있는 눈을 뜨게 하는데 는 매우 효 과적인 방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촌장이여, 탐심, 증오심, 우매함을 떠나 버린 사람이 여기에 있다 하자.그는 그런 것들을 떠난 까닭에 누구의 노여움도 사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남의 노여움에 자극되어 자기가 성내는 일도 없으리라. 그 때에는 모두 그를 일컬어 '얌전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 아니냐?" 이것은 바로 인간의 개간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무지몽매에 덮여있는 인간 정신의 황무지에서 탐욕을 갈아엎고, 증오심을 베어 내며, 어리석음 을 뽑아 내서, 거기에다 씨를 뿌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거기에 씨가 뿌려진대도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 다. 대지를 경작하는 데에도 적당한 비와 적당한 햇볕과 때에 맞는 거름과 때에 맞는 제초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인간 정신의 경작 또한 더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 일 중에서 계율과 정진이다. 즉 나날이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에서 악을 제어하는 일,그것 이 "내가 김매는 일"이라고 붓다는 말씀했다. 불교의 술어로 말한다면, 계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지를 경 작할 때도 일단 개간한 땅이라고 하여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문제이다. 잠 시라도 눈을 땅에서 뗀다면, 모처럼 자라던 곡식도 순식간에 잡초로 뒤덮 여 버리리라.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도 어느 만큼 되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일 그리하다가는 악성의 잡초가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신, 구, 의 삼업에 걸쳐 철저한 제초 작업이 나날이 되풀이되어 야 하는 것이다. 계(戒)라는 말은 우리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것 같다. 웬지 강요된 규제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일까? 그러나 계를 강요된 규제 사 항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받아들이는 태도에 잘못이 있는 것 같다. 이 말의 원어인 '시라(si-a)'라는 말은 습관, 성격의 뜻이다. 예로부터 불교인들은 흔히 이것을 설명하여 소극적으로는 '악을 막는 일(防非止惡)', 적극적으로는 '선을 향상시키는 일(諸善增上)'이라고 했다. 그것은 결국 나쁜 버릇을 없애고 좋은 생활 습관을 기르는 일이며, 바꾸어 말하면 좋은 방향으로 성격을 개조해 가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행위(身)와 언어(口)와 생각(意)에서 나날이 악의 풀 을 제거해 감으로써 뿌려진 진리의 씨를 잘 자라나도록 보살펴야 한다. 그것이 계요, 성격을 개조해 가는 불교적인 방식인 것이다. 나는 깨달았기에 이제 부터는 수행할 필요도 없고, 계율을 지킬 필요도 없 다는 그런 방식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가고 돌아섬이 없고, 행하여 뉘우침이 없는" 정신의 지속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마침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그것에 대해 비유로밖에 설해져 있지 않다. 감로, 즉 신들에게 바쳐지는 달콤한 술이라고. 이것은 이것대로 다른 항 목에서 설명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