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 곧 실상이다
꿈 같고 환상 같은 이 육신에 집착하지 말라. 나이가 들면 바로
죽음으로 돌아간다. 해탈하려면 모름지기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무기력하게 습관을 따르며 쾌락만을 쫓지는 말라.
시간은 순간 순간 덧없이 흘러가며, 굵게는 지(地)·수(水)·화(火)·
풍(風)에, 가늘게는 생(生)·주(住)·이(異)·멸(滅)의 4가지 모양에
핍박받고 있다. 바로 지금 4종의 모양 없는 경계를 알아서 경계
에 핍박 받지 않도록 하라. 무엇이 4종의 모양 없는 경계인가?
그대의 한 생각 마음의 의심이 땅이 되어 가로막고,
그대의 한 생각 마음의 좋아함이 물이 되어 빠뜨리고,
그대의 한 생각 마음의 성냄이 불이 되어 태우고, 그대의 한 생각
마음의 기쁨이 바람이 되어 휘몰아친다. 만약 이와 같이 분별해
낼 수 있다면, 경계에게 굴림을 당하지 않고 곳곳에서 경계를 쓸
수 있어서, 동쪽에서 솟았다
서쪽으로 가라앉고 남쪽에서 솟았다 북쪽으로 가라앉으며,
가운데에서 솟았다 가장자리로 가라앉고 가장자리에서 솟았다
가운데로 가라앉으며, 물을 땅처럼 밟고 다니고 땅을 물처럼
밟고 다닌다. 왜 이러한가? 지·수·화·풍의 4대가 꿈과 같고
환상과 같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는 것은, 항상 안정되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불안정하게 변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항상 안정되어 불변하는 것을 가리켜 實在니 실상(實相)이니
도(道)니 법(法)이니 진리(眞理)니 유일자(唯一者)니 창조주니
본래면목이니 본성(本性)이니 자성(自性)이니 불성(佛性)이니
본지풍광이니 부처니 조사니 하는 온갖 이름으로 부른다.
이름은 이렇게 다양하게 붙지만 안정되어 불변하는 이것은
사실 이름을 붙일 만한 그 무엇이 아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다른 무엇과 구별되는 그 무엇이어야 하는데, 불변하는
이것은 다른 무엇과 구별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모든
것이 그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 실속을
알고 보면 바로 불변하는 이것이다. 그러므로 삼라만상이 온갖
모습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저 이것
하나일 뿐이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모습에 속아서 다양한 의식의
세계를 살아가지만, 진실을 경험하게 되면 아무것도 없다.
온갖 다양한 모습이 모습 없는 이것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양함은 곧 다양하지 않음이요 다양하지 않음이 곧
다양함이며,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며, 모두가 곧
하나요 하나가 곧 모두이며, 변화가 곧 불변이요 불변이 곧 변화
이며, 생사(生死)가 곧 불생불사요 불생불사가 곧 생사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습 있는 것만을 경험할 뿐이고 모습 없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 까닭은 우리가 모습 있는 것만을 경험하도록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습 없는 이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컨대 차 한 잔을 마시는 경우를 살펴보자.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대개 입안에 느껴지는 차의 맛이나
코에 느껴지는 차의 향기나 예쁜 찻잔의 모습일 것이고,
더 나아간다면 어떻게 우아한 모습으로 차를 마시느냐 하는
자신의 차마시는 동작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경험하는 것은 모두 어떤 모습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모습들을 경험하는 그 움직임은 경험의 종류에
관계 없이 모든 경험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다양한 경험의
살아 있는 움직임 속에 바로 모양이 아니어서 변함 없이
항상하는 그것을 경험하는 길이 있다. 그 움직임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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