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따라 차별되지 않는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스스로를 믿어야 하지,
밖으로 향하여 찾아서는 안된다. 저 쓸데 없는 경계를 숭상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전혀 분별치 못하는 짓이다.
예컨데 조사가 있고 부처가 있다고 하여도, 모두가 가르침의
흔적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한 마디 말을 꺼집어내어 모르는
사이에 드러내면, 곧 의심이 생겨나 하늘을 비추어보고 땅을
비추어보며 남에게서 찾고 묻느라 매우 바쁘다.
대장부라면, 주인과 도적·옳고 그름·재물과 여색 등 쓸데없는
것들을 따지면서 세월을 보내지 말라. 나는 여기서 승(僧)과
속(俗)을 따지지 않고, 오는 자는 모조리 알아차린다.
그가 어느 곳에 나타나더라도 다만 소리요 이름일 뿐이니
모두가 꿈이요 환상이며, 반대로 경계에 타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이것이 모든 부처의 현묘한 뜻이다. 부처의 경계도 스스로 자기
가 부처의 경계라고 말할 수 없고, 도리어 이 의지함 없는 도인
이 경계를 타고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가와 나
에게 부처 구하기에 관하여 묻는다면 나는 곧 청정한 경계를
내어 응대해주고,
어떤 사람이 나에게 보살에 관하여 묻는다면 나는 곧 자비로운
경계를 내어 응대해주고, 어떤 사람이 나에게 보리에 관하여
묻는다면 나는 곧 깨끗하고 묘한 경계를 내어 응대해주고,
어떤 사람이 나에게 열반에 관하여 묻는다면 나는 곧 고요한
경계를 내어 응대해준다.
경계는 수만 가지로 차별되지만 사람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사물에 응하여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마치 물 속의
달과 같다.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무엇보다 말에 끌려다니지 말아야 한다.
범부·성인·중생·부처·보살· 불법·세간법·출세간법·바른 견해·
삿된 견해· 수행·깨달음·점수·돈오·조사선·여래선·주인공·본래
면목 등등 모두는 결국 말일 뿐이다.
우리는 이런 말들을 보는 순간 그 하나 하나에 대하여 어떤
그림을 그려서 이해한다. 그림을 그려서 이해하므로 허망할
수 밖에 없다.
뜻에도 쫓아가지 말고, 소리에도 머물지 말고, 느낌에도 구속되지
말고, 말하는 사람도 돌아보지 말고, 바로 지금 입을 열어서 말을
해보라. 이렇게 하면 말할 수가 없는가? 그저 아무 말이나 해보라.
아니면 지금 이 글을 읽어보라. 어떤가?
어디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어떤 무엇을
의식하지 않아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관심과 의식은 모두 모양을 갖추고 있으므로 허깨비이다. 그러므로
말할 줄 아는 것은 이런 허깨비와는 달리 따로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 말할 줄 아는 이것은, 의식될 수 있는 어떤 사물도 뜻도
그림도 느낌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모양있는 경계의 바탕이 되어 경계와 함께
나타난다. 경계가 있으면 이것도 있지만 경계가 바뀌더라도 이것은
바뀌지 않고 한결같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에서는
5온은 다양하게 바뀌더라도 그 모두가 공(空)일 뿐이라고 하는 것
이다. 공이라는 것은 한 물건이나 모양있는 경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5온의 경계는 다양하게 변하지만 그 모든 경계가 한결같이 공이므로
공이야말로 참된 실재이다.
공은 고정된 사물이나 뜻이나 그림이 아니라, 지금 이러한 모든
경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살아 있는 것이다. 공이 경계의 생멸변화에
따라 생멸변화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가 없지만, 경계가 있으면 공의
작용을 알 수가 있고 경계가 없으면 공의 작용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의식의 생멸변화 위에서 공에 통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지금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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