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자리 그대로 진실하다
그대들이 법에 어긋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모름지기
대장부여야 가능하지 힘 없이 따라 다녀서는 불가능하다.
예컨대 깨어진 그릇에는 맛있는 우유를 담을 수 없는 것
과 같다. 큰 그릇이라야 남에게 속지 않고, 이르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고 선 자리가 모두 진실하게 된다.
다만 다가오는 것은 모두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니, 그대들이
한 생각이라도 의심한다면, 곧 마구니가 마음으로 들어온다.
예컨데 보살이라 하더라도 의심할 때에는 생사(生死)의
마구니가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단지 생각을 쉴 수 있다면 그 뿐, 다시는 밖으로 구하지 말고
다가오는 것이 있으면 비추어 보라.
그대들이 다만 지금 작용하는 이것을 믿기만 하면 아무
일도 없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삼계(三界)를 낳고,
인연따라 나누어져 육진경계(六塵境界)가 된다. 그대들이
지금 작용하는 곳에 무슨 모자람이 있는가?
우리에게 가장 큰 병은 경계를 따라가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경계는 자신에게서 비롯되고 자신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경계만을
쫓아다닌다.
중생이 거꾸로 뒤집어져 있다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한 폭의 그림을 보고 한 소절의 음악을 듣는다고
하자. 그림과 음악의 존재와 의미가 어디에서 생겨나 어디에
살아 있는가? 우리는 그림이 액자 안에 붙여져 있는 화폭에
있고 그림 속에 그 의미가 담겨 있다고 여긴다.
또한 우리는 음악이 악기에서 나오고 음악의 화음 속에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여긴다.
이것이 보통사람들의 의심 없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이런 생각은 그야말로 근본과 말단을
뒤집은 잘못된 생각임을 알 수가 있다.
어떤 그림이건 보는 눈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며, 어떤 음악이든
듣는 귀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림의 존재와 의미는 보고 느끼는 곳에 있으며, 음악의 존재와
의미는 듣고 느끼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그림과 음악은 저쪽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쪽
나에게 있다.
하지만 보이는 색깔이 곧 '나' 자신인 것은 아니고 들리는 소리가
곧 '나' 자신인 것은 아니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 보고 있고
듣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볼 줄 아는 것이 바로 '나'요
들을 줄 아는 것이 바로 '나'이다. 볼 줄 아는 여기에서 '나'가
살아 있고 들을 줄 아는 여기에서 '나'가 살아 있다. 이처럼
'나'의 존재는 바로 지금 여기에 살아 작용하는 것이다.
육체가 '나'가 아니라 육체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나'요, 느낌이 '나'가 아니라 느낌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나'요, 생각이 '나'가 아니라 생각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나'요, 욕망이 '나'가 아니라 욕망을 발동시키는
것이 바로 '나'요, 의식이 '나'가 아니라 의식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참된 '나'이다.
'나'아닌 육체나 느낌이나 생각이나 욕망이나 의식은 모두
생겨나고 사라지는 변화를 무상하게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나'는 그러한 생멸변화과 늘 함께 하면서도 생멸변화 없이
항상 그대로 바로 여기에 지금 '나'에게서 분리되지 않고 있다.
사실은 '나'라고 할 어떤 물건도 없지만, 지금 이렇게 '나'에
관하여 말하고 생각하고 하는 활동은 없었던 적이 없다.
그럼 육체와 의식이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깊은 잠 속에서는
'나'는 어디에 있느냐고? 육체와 의식에는 활동이 있고 정지가
있지만, '나'에게는 활동과 정지가 구분되어 따로 있지 않다.
어떻게 그런가? 잘 살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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