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은 없다
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깨끗하고 묘한 국토에 들어가서는 청정한
옷을 입고 법신불을 말하며, 차별 없는 국토에 들어가서는 차별
없는 옷을 입고 보신불을 말하며, 해탈국토에 들어가서는 광명의
옷을 입고 화신불을 말한다.
그러나 이 삼안국토(三眼國土)는 모두가 의지하여 변하는 것
들이다. 경론가(經論家)라면 법신을 근본으로 삼고 보신과 화신
을 응용으로 여기겠지만, 나의 견처에서는 법신이라 하더라도
법을 설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말하기를, [불신(佛身)
은 뜻에 의지하여 세워지고, 불국토(佛國土)는 바탕에 의거하여
논한다]라 한 것이다.
법성신과 법성토가 만들어진 법이며 의지하여 통하는 국토로서,
빈 손에 누른 잎사귀를 쥐고서 어린 아이를 속이는 짓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가시덤불의 마른 뼈다귀 위에서 무슨 즙을 찾느냐?
마음 밖에도 법은 없고 마음 안에도 법은 없는데, 무슨 물건을
찾는가?
선종에서는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하고, '뜻으로 헤아릴 수
없고 말의 길이 끊어진다'고 하고, '생각을 움직이고 입을 열면
벌써 어긋났다'고 하고, <금강경>에서는 '모양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하고, 임제는 '입을 열 수도 없고 발을 디딜 곳도 없다'
고 하고, '실상(實相)은 무상(無相)'이라고도 하고, '법은 머무름
이 없다'고도 하고, 노자(老子)는 '도는 현묘(玄妙)하여 도를 도
라고 하면 어긋난다'고 하고, 장자(莊子)는 '그 이유를 찾을 수
도 없고 주재자(主宰者)도 없다'고 한다.
우리는 도(道)니 법(法)이니 실상(實相)이니 실재(實在)니 진여
(眞如)니 진리(眞理)니 마음이니 불성(佛性)이니 자성(自性)이니
하는 등등의 말을 사용하여 공부할 대상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이름들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붙일 때 그 이름을 붙일 대상을 먼저 경험하고 그 대
상에 대응하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대상은 어떤 사물일 수도 있고, 어떤 경험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름만 생각하고 이름만 말할 뿐, 실제 그 이름이 가리키
는 대상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 이름은 헛된 것이다.
우리는 그 이름에 대응하는 대상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그 이름을
더욱 잘 믿고 잘 기억하며 잘 분별한다.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의식하는 모든 이름들이 전부 그렇다. 다시 말해 이름과 대상은
항상 서로 짝으로 대응하여 우리에게 기억되고 생각되고 경험됨
으로써 사실로 인정 받는다.
즉 우리는 헛것인 이름과 실제인 대상을 동일시하는 버릇이 있다.
보통의 경우에는 이런 버릇이 오히려 우리의 결정과 행동을 가능
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즉 우리는 생각과 말이라는 헛것을 통하여
추리하고 결정한 뒤에 행동에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이런 헛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처럼 허깨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공부란 결국 이런 공허한 허깨비의 삶
을 벗어나 순간 순간 진실하고 실재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공부의 출발은 우선 헛것인 이름과 생각의 굴레를 벗어
나는 것이다. 도를 실제로 경험하는 기회를 맞으면 이름과 생각은
저절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름과 생각이라는 헛것 조차도 도의 경험
을 벗어나 따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도 위에서만 이름도 생각도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도란 무엇인가? 이렇게 말하는 이것이 바로 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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