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용과 하나 되어라
여러 곳에서는, [닦아야 할 도가 있고, 깨달아야 할 법이 있다]고 말들을
한다.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닫고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작용하는 곳에 무엇이 모자라며, 어느 곳을 닦아서 보충하
겠다는 것인가? 공부하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지 못하면, 곧 이런 부류의
들여우·도깨비를 믿고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사람들을 결박
하고는, [이치와 행동이 서로 응하고 3업을 다스려야 비로소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자는 봄날의 가랑비처럼 많다. 옛 사람은 말하기를,
[길에서 도 통달한 사람을 만나거든 무엇보다도 도에 관하여 말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만약 사람이 도를 닦는다면 도는 행해지지 않고, 만
가지 삿된 경계가 다투어 나타난다. 지혜의 칼을 빼면 한 물건도 없으니,
밝음이 나타나기 이전의 어둠 그대로가 곧 밝음이다]라고 한다.
그 까닭에 옛 사람은, [평상시의 마음이 바로 도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잘못된 공부의 대표적인 형태가 의식적 조작을 통하여 어떤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공부가 커다란 관심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관심과 노력은 어떤 부자연스런 상황를 조작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왜곡되어 있었던 정신구조를 자연스럽게 바로잡는 관심과
노력이어야 한다.
공부를 한다는 행위에서 관심과 노력은 기본적으로 의도적이고 조작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공부를 하고자 하는 발심에서 이미 의도적인 면이 있고, 공부를 하는 노력
에 이미 조작적인 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조작해 가기만 해서는 타고난 본성을 깨닫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깨달음이란 본성을 일깨워서 본성 스스로가 스스로를 자각(自覺)하도록 하는
일이다. 공부는 유위행(有爲行)이 아니라 무위행(無爲行)에 의해서만 완성
된다. 본성 스스로가 깨어나야 하는 것이다.
사실은 본성은 항상 깨어 있지만, 다양한 모양을 가지고 변화하는 의식
(意識)이라는 현상에 눈길을 빼앗겨서 본성이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치 눈(眼)이 보이는 대상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그러한 대상을 보게 하
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없는 것과 같다.
눈이 보이는 대상 위에서 자신을 찾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성이
나타나는 의식 위에서 자신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현묘한 이치
나 그럴듯한 문자나 황홀한 느낌이나 뛰어난 육체적 능력 등을 추구하면서
본성을 찾는 공부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
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의식의 조작품으로서 본성 스스로가
비추어내면서도 또 스스로 끄달려가는 신기루 같은 허깨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눈이 바깥의 사물을 볼 수 있을 뿐 스스로를 보지는 못하는 것처럼,
본성도 의식을 알 수 있을 뿐 스스로를 알지는 못한다. 그렇긴 하지만 눈이
스스로를 깨닫는 길은 바깥의 사물을 보는 행위를 통하는 것뿐인 것처럼,
본성도 스스로를 깨닫는 길이 의식이라는 나타나는 현상을 통하는 것뿐이다.
눈은 대상을 바라보되 보이는 대상만을 보고 대상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보고 있는 자신 본다는 작용 그 자체를 자각할 때 비로소 스스로의 존재가
확인된다. 마찬가지로 본성도 의식의 세계를 경험하되 경험되는 세계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지금 보고·듣고·말하고·생각하고·행동하는 가운
데 변함 없이 바탕이 되는 작용 그 자체가 되어서 다만 그렇게 작용할 뿐일
때 비로소 스스로의 존재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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