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멀쩡한 눈을 저버리지 말라
도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이 늙은 중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참된 도(道)라고 여기고는,
선지식은 불가사의하고 나는 범부의 마음이니 감히 저 노인을 헤아려
볼 수가 없다고 여긴다. 어리석은 자들아, 그대들은 일생 동안 단지
이러한 견해만 지으며, 스스로의 멀쩡한 두 눈을 저버리고 있구나!
마치 얼음 위를 걷는 망아지처럼 차갑게 입을 다물고서, 나는 감히 선
지식을 훼손하지 못하니 구업(口業) 짓는 것이 두렵다고 여긴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큰 선지식이라야 비로소 부처와 조사를 훼손할 수
있으며, 천하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가려내고, 대장경의 가르침을 배척
하며, 어린 아이 같은 무리들을 비난하고, 순조롭고 어려운 가운데에
참사람을 찾는다. 그러므로 나는 20년 동안 업의 성품을 찾았으나 겨자씨
만큼도 얻을 수 없었다.
새색시 같은 선사라면, 절에서 쫓겨나 밥도 얻어먹지 못할까 두려워 안정
되지도 즐겁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옛부터 선배들은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믿지 않아 쫓겨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법이 귀한 것인줄 알았다.
만약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긍정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자가 한 번 울부짖으면 들개의 무리는 머리통이 부서지는 것
이다.
공부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확신이 가장 중요하다. 선공부란
바로 자신의 본래면목, 스스로의 참 존재를 확인하는 체험이다.
그러므로 선 공부는 궁극적으로 자기가 본래면목을 직접 확인하는 체험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이고, 남에게 확인받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본래면목을 확인하면 나와 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이치로
보아서도 이 점은 분명하다.
나 자신에게서 직접 확인된다는 것은 바로 법이 나 자신에게서 실현되고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란 바로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여기에서 모든 세계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내가 곧 세계의 중심이다. 내가 세계라는 그림을 보고 있는 주관
(主觀)이라는 말이 아니다.
참된 나는 보고 보여지는 관계 속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그저 지금 눈
앞에 살아 있을 뿐이다.
보통 살아 있다고 하면 몸이 움직이고 생각이 일어나고 의식이 활동하고
느낌이 살아 있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몸이나 생각이나 의식
이나 느낌을 따라 가서는 진실로 살아 있는 것을 놓치게 된다.
진실로 살아 있는 것은 몸이나 의식이나 생각이나 느낌의 움직임과 함께
드러나지만, 이런 것들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여 사라진다고 할수는 없다.
언제든 이런 인연 저런 인연 이런 경계 저런 경계가 드러나면 살아 있음이
확인되지만, 인연이나 경계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 없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있다거나 없다거나 인연을 따른다거나 인연을 떠난다거나 하는 판단
을 통해서는 진실로 살아 있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단지 몸이 움직이고 생각이 일어나고 느낌이 있고 의식이 움직일 때, 오직
살아 있음만이 진실하고 몸이나 생각이나 느낌이나 의식은 더이상 진실하지
않게 되어야 비로소 참된 살아 있음에 금 접근한 것이다. 오직 살아 있음
만이 눈 앞에서 생생하게 진실하지만, 살아 있음을 살아 있음으로 인식하
거나 느끼거나 말하거나 찾거나 한다면, 그 순간 살아 있음은 우리의 시야
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눈을 감아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눈을 떠는 그것이 바로 살아 있음인데, 다시 살아 있음을 찾고
있으니 어찌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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