닦음도 깨달음도 없다
그대들 여러 곳에서는
[닦을 것도 있고 깨달을 것도 있다]라고 말들하지만, 착각하지 말라.
설사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업 짓는 일이다.
그대들은 또 육도만행(六度萬行)을 고루 닦는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
에는 역시 모두가 업 짓는 일이다. 부처를 찾고 법을 찾는 것은 곧 지옥
갈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찾는 것 역시 업 짓는 일이며,
경전을 보고 가르침을 살피는 것 역시 업 짓는 일이다.
부처와 조사는 일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유루유위(有漏有爲)와 무루무위(無漏無爲)가 모두 청정한 업이
되는 것이다. 어떤 눈먼 중은 배불리 밥을 먹고는 곧 좌선관행(坐禪觀行)
을 하여, 생각을 꼭 쥐고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고 시끄러운 곳을 싫어
하고 고요한 곳을 찾으나, 이것은 외도(外道)의 법이다.
조사께서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마음을 멈추고 고요함을 살피며, 마음을
들어서 밖으로 비추고 마음을 붙잡아 안으로 깨끗이 하며, 마음을 모아서
삼매에 든다면, 이와 같은 짓들은 모두가 조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대는 지금 이렇게 법을 듣는 사람인데, 어떻게 바로 그 사람을 닦겠으며
깨닫겠으며 장엄하겠는가? 그 사람은 닦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장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장엄하게 한다면 모든 것을
장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착각하지 말라.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행위를 할 때에는 반드시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조작하여 행한다.
그 목적이 어떤 생각을 추구하는 때이든, 어떤 동작을 취하려는 때이든,
늘 그렇다.
이 점은 마음을 찾는다고 하는 목적을 가진 마음공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음공부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마음의 참 모습을 찾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에 따라 수행을 한다.
그 방법들은 대개 의도적으로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여 생각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생각의 흐름을 주시하거나, 하나의 관념적 대상을 골똘히 생각하거나,
육체의 어떤 부위에 관심을 집중하거나, 자기암시적인 문구를 끊임 없이
반복하여 암송하거나,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에 빠져 있거나 하는 등등이다.
물론 여기에는 육체적인 수련이 동반되기도 한다. 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호흡을 조절한다.
그러나 이런 의도적인 행위들은 모두 물고기가 물 속에서 물을 찾는 오류
를 범하고 있다. 의식을 움직이고 육체를 사용하는 행위가 이미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마음은 충분히 입증된 것이다.
의식과 육체를 움직이는 것이 이미 마음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도적 수행이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마음을 찾는 일이란 비유하여 말하면, 눈(眼)을 찾는 일과 같다.
눈은 항상 자기 밖의 사물만을 볼 수 있을 뿐이고, 자신을 볼 수는 없다.
눈이 자신을 찾기 위하여 온갖 곳을 두리번거리거나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거나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다고 하여 눈이 스스로
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눈이 눈을 찾는 유일한 길은 무엇을 보는 순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본다는 행위가 바로 눈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본다는 행위만으로 눈의 존재는 드러난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의식이 활동하는 순간 마음의 존재가 확인된다. 마음의 존재가 확인되는
유일한 길은 의식의 활동일 뿐이고, 의식이 어떻게 활동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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