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靑波 作品/追億의 蔚山

慶州 裵氏의 有來

靑 波 2003. 12. 29. 23:29

      경주배씨(慶州裵氏)

      유래

    경주 배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전설 에 나오는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금산 가리촌장(金山 加利村) 지타(祗陀)가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하고 총재태사에 올랐다.
    그 후 32년(유리왕 9년)에 금산가리촌을 한지부로 고치고 성을 배씨로 하사하였다. 후에 한지부가 경주로 이름이 바뀌어서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그 후의 후손은 기록이 없으며, 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로 하고 있으나  현경의 초명(初名)은 백옥(白玉:혹은 白玉衫)이었는데, 뒤에 태조에게 배씨 성(裵氏姓)을 사성 받았다.



    중시조 배현경은 담력이 크고 용맹하며 지략이 뛰어나 궁예가 고구려에서 태봉이란 나라를 세울 때에 이를 도와 행오에서 출발하여 기장에 이르렀다.
    그러나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 년 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당시 동료 기장이었던 신숭겸 , 복지겸 ,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기로 하고 왕건에게 왕창근, 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하고 개국 일등원훈에 서훈되었으며 '고려사'에 고려 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919년(고려 태조2년)에 도읍지를 송도로 옮길 때 개주 도찰사가 되어 새 도읍을 건설하는데 공을 세우고 궁예의 잔당을 소탕하는데 공을 세워 대상행이조상서 겸 순군부령도총 병마대장에 이르렀다.
    936년(태조 19년) 그가 병으로 위독하자 태조가 친히 문병하며 '경의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 하고 나가자 죽었다. 왕이 부음을 접하자 가마를 멈추고 통곡하였다. 995년(성종15년)에 평산 태백성에 태사 사를 세워 매년 봄, 가을에 향사한다.
    그의 현손 사혁(斯革)에게 네 아들이 있는데, 첫째 원룡(元龍)은 김해, 둘째 천룡(天龍)은 성주, 셋째 운룡(雲龍)은 대구, 넷째 오룡(五龍)은 흥해로 각각 분 적하고, 다시 흥해 에서 협계로 갈린 것으로 문헌에 나타나 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인물은 김해배씨의 시조 원룡,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총지휘한 중손(仲孫), 대구배씨의 정지(廷芝)와 그의 아들 천경(天慶) 등이다.
    조선시대에는 개국공신 극렴(克廉)이 대표적 인물로 영의정을 지냈고 조선 《상신록(相臣錄)》의 첫머리에 나타나 있다.

    그 밖에 김해배씨의 맹후(孟厚)·대유(大維), 성주배씨의 흥립(興立)과 그의 아들 시량(時亮), 그리고 진손(晉孫)·신(紳)·명순(命純) 등이 있다.
    또 대구배씨에서는 익신(益臣)·진명(晉明)·성유(聖兪) 등이 유명하고, 흥해배씨에서는 삼익(三益)과 그의 아들 용길(龍吉)이 두드러진 인물이다. 배씨는 조선시대에 47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자료:네이브.야후 백과사전 등

        '靑波 作品 > 追億의 蔚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물동 마애여래좌상   (0) 2004.01.10
        활동사진(映畵)과 辯士  (0) 2003.12.31
        무룡산(舞龍山)의 용과 선녀  (0) 2003.12.30
        울산(蔚山)의 변천사  (0) 2003.12.25
        내고향 연암(蓮岩) 전설  (0) 2003.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