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나눔의 쉼터/中要 6 經典集

금강경 강의 一相無相分 第 九

靑 波 2003. 8. 2. 15:06
 
    一相無相分 第 九 제9분 하나의 상도 아님 부처님의 깨달음, 부처님의 설법,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킨 『금강경』을 반야의 거울에 비추어 보았더니 그 무엇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텅 비어 적적(寂迹)하였습니다. 불성의 실다운 모습은 모양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도 무상(無相)이고 저것도 상이 아니었습니다.모든 수행(修行)의 결과는 이 실상에 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보살, 부처가 다 이 실상 반야의 현현(顯現)이라면 결과의 모양 이 있을 수 없으며 얻었다는 마음의 흔적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도 무상이고 저것도 무상이면 최후에 '무상이라는 상'은 진실이겠네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마는 그 '무상 이라는 상'도 끝가지 상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須陀洹이 能作是念호대 我得須陀洹果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수다원 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부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하는가." 지금까지는 부처님의 깨달음, 설법, 『금강경』을 반야의 거울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이제는 수행자와 수행의 결과도 그렇게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의 수행의 수준 단계를 하나씩 반야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소승(小乘)불교에서는 성자(聖者)가 되는 단계를 대개 네 단게로 구분하였는데 이 모든 것을 다 부정해 보이면서 수행에 의해 깨달음을 이루었다 하는 상을 털어 냅니다. 먼저 소승 네 단게의 첫째 단계인 수다원을 살펴 봅니다. 첫째 수행 단계인 수다원을 수행하여 수다원과를 얻은 사람이 스스로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고 부처님께서 물었습니다. 소승 불교에서는 수행의 단계를 네 단계로 보지만, 대승 불교에서는 오십이 단계로 세밀 하게 나눕니다. 『화엄경』을 보면 우리들이 깨달음을 얻어가는 단계를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 (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오십이위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부처님을 만나서 부처님을 따르고 믿는 것이 열 단계이고 그것이 지나면 불법 안에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데 그것도 열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보현보살행을 할 것이다. 나는 관세음보살행을, 나는 지장보살행을 할것이다.'하는 서원을 세워 실천해 갑니다. 그러다가 좀 더 경지에 깊어지면 회소향대(廻小向大)하여 보 다 높고 깊은 세계로 들어가 진실한 회향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는 내 아이의 입학을 위해 기도했지만 이제부터는 그들의 성불을 위해 기도하겠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큰 다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단계가 더욱 깊어지면 우주와 삼라만상의 진리와 실상을 바로 보게 되는 지혜가 뚫리 게 됩니다.이 과정들이 각각 열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 지위가 지나면 거의 성불에 이르른 등각(等覺)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드디어 개달음을 얻어 불지위(佛地位)에 오르는 묘각(妙覺)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체 오십이위가 되는 것입니다.우리들의 큰 스승 원효대사는 흔히 팔지 보살이 라고 합니다.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 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須陀洹은 수보리 언 불야 세존 하이고 수다원 名爲入流로대 而無所入이니 不入色聲香味觸法일새 是名須陀洹이니이다 명위입류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 시명수다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수다원을 입류라 지만 들어간 바가 없으니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이를 이름하여 수다원이라 하옵니다." 수다원은 범어로서 입류(入流)라는 뜻입니다.또는 성류(聖流), 예류(預流)라고도 합니다. 말 그대로 성자의 무리, 수행자의 무리에 들었다는 것입니다.우리들에게 말하자면 불교 에 입문했다.경전 공부에 발심했다. 기도에 동참했다. 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안, 이, 비, 설, 신, 의를 통해 인식하는 색, 성, 향, 미, 촉, 법의 객관에 들어간 흔적이 있는 것이 아니니 최초의 수행 단계에 올랐다 하더라도 그 올랐다 하는 마 음의 때가 있으면 수다원과를 얻엇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斯陀含이 能作是念호대 我得斯陀含果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사다함 능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부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이니다 世尊하 何以故오 斯陀含은 名一往來로되 수보리 언 불야 세존 하이고 사다함 명일왕래 而實無往來일새 是名斯陀含이니이다 이실무왕래 시명사다함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사다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사다함을 얻었다.' 하는가."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사다함은 일왕래로되 왕래함이 없으므로 이름을 사다함이라 합니다." 수행의 둘째 단계 사다함은 일왕래(一往來)입니다. '한번 갔다온다'라는 뜻인데 두 가지 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인간으로서 사다함에 올랐다 하는 것은 사람이 천상(天上)에 한번 갔다가 다시 인간으로서 와서 최후에 아라한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다함이라는 두 번째 수행의 단계에 올랐다 하더라도 나름대로 '나는 도를 알았다. 얻은 바가 있다.'라는 상이 남아 있으면 사다함과에 올랐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실로 없기 때문에 사다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한 십 년쯤 불교를 열심히 믿고 수행을 하였다고 해서 '나는 불교인이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십 년쯤 정진 했어도 그러한 흔적이 없기 때문에 십 년쯤 다녔다 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阿那含이 能作是念호대 我得阿那含果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아나함 능작시념 아득아나함과부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이니다 世尊하 何以故오 阿那含은 수보리 언 불야 세존 하이고 아나함 名爲不來로대 而實無不來일새 是故로 名阿那含이니이다 명위불래 이실무불래 시고 명아나함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냐. 아나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내가 아라함과를 얻었다.' 하는가." 수보리가 말씀 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오지 않는다 하오나 실로는 오지 않음이 없으므로 이름을 아나함이라 합니다." 세 번째 단계 아나함의 사전적 의미는 '오지 않는다'라고 하는 불래(不來)입니다. 여기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천상으로 가든지 다른 세상 으로 가서 다시는 여기로 올 필요가 없이 거기서 아라한이 된다는 것입니다. 스님네들 사이에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저 사람은 중물이 안 들었다." 같은 불문(佛問)에서 호흡을 같이하고 뜻을 함게 세우려면 수행자의 면모가 나타나야하는데 중물이 안 들었다는 것은 아직도 세속의 생활 모습을 다 일소시키지 못햇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면 "아직도 중물이 안 빠졌다."라고 의미있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수행자의 무리에서 뛰어나와 속인이 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중물이 빠졌다는 것은 수행의 연륜이 쌓이고 쌓였지만 상이 없고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중물이 안 드는 것이 문제이지만 나중에는 중물이 안 빠지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제대로 중물이 잘 들고 잘 빠져야만 완숙한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 스님은 일체 만법이 자신 안에 있음을 깨닫고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그동안 중생으로서 번뇌에 물들고 더럽혀진 것으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정말 훌륭 하고 청정한 것이구나, 나는 태어나고 죽고 하는 고통의 존재인 줄 알았는데 실은 태어난 적이 없으며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영원불멸(永遠不滅)한 존재구나. 나는 가난하고 무식하고 지지리 못난 사람으로 알았는데 사실은 모든 학식과 지위와 명예 와 부귀를 다 구족하고 있구나. 나는 누구의 힘에 의하여 만들어진 존재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創造)한 바로 그 사람이구나." 임제(臨濟?-876) 스님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행자들이여, 다른 곳에서는 '도를 닦는다'고 하며 '법을 닦는다'고 한다. 여러분들에게 말하노니, 무슨 법을 깨달으며 무슨 도를 닦는단 말인가? 여러분들이 지금 쓰고 있는 데서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후배인 못난 중은 모를 일이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면 卽非菩薩이니라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 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상(相)'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소견이나 인식, 또는 번뇌가 '생각 상(相)'의 상태를 지나 어떠한 고정된 형상처럼 너무나 견고하게우리 내부에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을 말 합니다. 반야의 보검으로써 과감히 잘라버려야 할 네 가지의 전도(顚到)된 소견입니다. '아상(我相)'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것, 또 나라고 하는 집착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와 사건을 말합니다. '이상(我相)'은 나 외의 '남이다' 하는 차별에서 생기는배타 의식이나 차별 의식을 말합 니다. 내 것만 좋고 내 소견만 옳다 하며 남의 의견, 남의 종교 다 물리칩니다. '중생상(衆生相)'은우리는 못난 존재라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힌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들이 다 부처다우리들 내부에 있는 불성을 찾 아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수자상(壽者相)'은 나이에 대해 편협된 집착 즉 나는 지금 몇살이다. 젊었다 늙었다 또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는 존재이다.하는 한계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신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장애(障隘)가 됩니다. 아상의 번뇌를 통해 인상이 나오고 또한 중생상, 수자상이 차례로 나오게 됩니다. 사실 아상은 매우 미세한 번뇌로서 끊임없이 노력을 해도완전히 떨쳐버리기가 참으로 어렵니다. 어느 순간에는 떨쳐버렸는 줄 알았다가도 어느새 또 나에 대한 집착, 상대에 대한 고정관념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나 중생상, 수자상으로 갈수록 갈수록 거친 번뇌라 비교적 상에서 벗어나기가 쉽 습니다. 그리고 불교는 본질적으로 나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마음자리가 진실한 삶이라면 마음은 나이를 먹지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자리에는 "천지보다 먼저 되었으되 그 비롯함이 없고, 천지보다 뒤에까지 있으되 그 마침이 없다. (先天地而無基始 後天地而無基終)"라고 하였으니 어디를 도막내어 몇살이다 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生만을 기준으로 해서 '젊다' '늙다' '몇 살이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10세 소년이 전생(前生)의 나이까지 합쳐 60세 노인보다 더 나이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에 어디 나이가 있겠습니까? 그게 우리의 참모습입니다.옛날 '구자불성(拘子佛性)'으로 유명한 조주 스님은 120세 까지 살았습니다. 제자들이 여쭈어 보았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어떻게 그토록 오래 사실 수가 있으십니까?" "나는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하루 24시간에 부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24 시간을 부린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이나 시간에 부림을 당하지 않으면 늙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젊게 살고 무엇에든지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좀 돕자."고 하면"이 나이에 무얼 해. 젊은 사람들이나 하도록 내버 려 두지."하며 뒤로 물러나고 안으로 숨으려 듭니다. 젊은 아이들만 봉사 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남을 위해 무엇인 가 도움이 되고 작은 한모퉁이라도 비추는 등불이 되고저 노력해야 합니다. 적어도 불교인이고 보살이라면 최소한 나이에 대한 고정 관념을 떨쳐내고 적극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의상대사께서는 법성게(法性揭)에서 '파식망상필부득(파息妄想必不得)'즉 "망상을 쉬지 않을래야 쉬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처럼 불교를 통해서 우리의 참생명을 바르게 이해하면 본래로 없는 아상(我相), 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낼래야 낼 수가 없고 번뇌도 저절로 쉬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력(願力)과 생명력(生命力)이 넘치는 반야의 삶을 펼쳐 보이는 보살 의 인생, 부처의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