依法出生分 第八
제8분 법에 의해 출생함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모두 만고(萬古)에 빛
나는 이 『금강경』으로 부터 나왔습니다.
눈에 잡히는 이경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것은 한생각도 일어나기 이전의 공적(空寂)한 마음자리, 근원자리
입니다.
우리들은 부모님의 은혜(恩惠)에 의해서 세상에 태어나 육신이 자라고,
나름대로 윤리를 실천하고 도덕을 지켜가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올바른 진리와 법에 의하여 매일매일 계속하여 새롭게 탄생해야 합니다.
육체적인 탄생은 우리의 의지(意志)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더없이
높고 큰 『금강경』의 가르침에 의해 부단히 노력하여 우리들을 한없이
향상시켜야 합니다.
소나무에 의지한 칡덩쿨은 하늘을 찌를듯이 뻗어가고 잔디 속에서
자라는 칡은 계속 땅으로 가는 법입니다.
부처님과 같이 위대한 가르침과 함께하고 있는 우리들을 이 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 너머까지 계속 진리의 몸을 새롭게 탄생시켜야
할 것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若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利用布施하면
수보리 어의운하 약인 만삼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
是人의 所得福德이 寧爲多不
시인 소득복덕 영위다부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얼마나 많겠는가."
불교의 우주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의 거대한 수미산이 우주의 중앙에 자리잡아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동, 서, 남, 북의 사천하로 나누어 동쪽을 동승신주
(東勝神洲), 서쪽을 서우화주(西牛貨洲), 남쪽을 남섬부주(南贍部洲),
북쪽을 북구로주(北瞿盧洲)라고 하며 이것을 사대주라 합니다.
절에서 축원문을 읽을 때 일 사천하 남섬부주 동양 대한민국 집의
주소순으로 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속한 데는 남섬부주입니다.
일 사천하를 한 세계라 하는데 이 한 세계가 천 개 모이면 일 중천
세계가되며 일 중천세계가 천 개 모이면 일 대천세계가 됩니다.
삼천 대천세계라는 것은 대천세계가 삼천 개라는 뜻이 아니고
천을 세 번 거듭했다는 뜻입니다.
어떻든 상상하기도 어려운 어마어마한 큰 세계를 말합니다.
칠보는 대개 금, 은, 유리, 산호, 마노, 적진주, 파려를 일컫는데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을 통털어 말합니다.
등록금을 대신 내어 주거나 병든 사람의 수술비를 마련해 주는등
이웃 돕기에 동참을 하면 신문이나 텔레비젼에 소개되고 우리들도
칭찬을 아끼지않습니다.
이와 같은 작은 보시도 돌아오는 칭찬의 복덕이 큰데, 만약에 온
우주에 가득찰 정도의 칠보를 가지고서 남을 위해 베풀엇다면
그 사람이 받을 복 덕은 얼마나 될지 상상을 할 수도 없습니다.
아마도 곳곳에서 칭찬의 소리가 드높고 일 년 내내 온 세계의
매스컴이 보도하고 칭찬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 사름을 칭송할 신문사나 텔레비젼 방송국을 차려도
될 정도로 복덕이 클 것입니다.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是福德이
수보리 언 심다 세존 하이고 시복덕
卽非福德性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福德多니이다
즉비복덕성 시고 여래 설복덕다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이 까닭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복덕이란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한 복덕을 말합니다.
그토록 귀한 보물로 그렇게도 많이 보시하였으므로 당연히 돌아오는
복덕이 많을 것입니다마는 복덕성(福德性), 즉 우리들의 본성자리에는
하등의 이익이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진실 생명에다 비교해 보면 무한한 허공 중의 먼지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느냐 하면 성품(性品)이란 본래로 옳다 그르다 있다 없다 얻었다
잃었다 하는 양변(兩邊)에서 모두 떠나 공적한 자리이고 또한 걸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일반적인 상식 내지 철학이나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무념
(無念)의 세계와 우리의 사변(思辯)을 초월하는 무한(無限)의 세계에
대한 언급입니다.
무한의 세계를 흔히 허공에 비교하는데, 허공은 많다, 적다의 한계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많은 허공, 적은 허공이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허공과 같이 무량(無量) 무변(無邊)한 것이 바로 우리들 마음의
복덕이고 진실한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영원히 새지 않아 참답고 청정한 복덕(福德)인 것입니다.
얕은 소견에서 볼 때에는 복덕이 많다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적으로 생각해 보면 많다 적다는 것도 결국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시간만 있으면 다 계산을 해낼 수가 있고,
언젠가는 다 써서 흘러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물질로써 보시하여 돌아오는 복덕이 많다고
하여도언젠가는 다 할 때가 있고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덕성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 생명과 비교해 보면 그것은 결국 샘이 있는 유루복
(有漏福)에 지나지 않음을 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 受持乃至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약부유인 어차경중 수지내지사구게등 위타인설
其福이 勝彼 하리니
기복 승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지녀서 다른 사람을 설한다면
그 복이 저 앞의 복보다 스승하리니.
금강경 전체나 아니면 사구게만이라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남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한 공덕보다 훨신 스승합니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겠지만
지혜의 눈을 뜬 사람이 보면 정말로 그러합니다.
금강경』의 도리나 사구게의 가치는 진실로 다함이 없고 결코 새지
않는 큰 복인 것입니다.
사구게의 복만 해도 이러할진대 『금강경』전체를 공부하고 아침
저녁으로 독송(讀誦)힌다면 그 복은 과연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온 우주를 다 덮고도 남을 것입니다.
상을 떠나보낸 그 자리에서 활짝 드러나는 우리들 본성의 위력을
남을 위해 설해주어 그 사람의 본성도 일깨워 주는 그 공덕은 정말
어떠한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수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보시할 게 뭐 있느냐.
『금강경』만 잘 지니고 읽으면 되지."해서도 곤란합니다.
아무리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이라도 그릇에 담겨 있어야
우리들이 먹을 수 있습니다.
법당이 있어야 귀중한 법회가 열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질적인 딧받침을 한다는 것은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 대단히 중요합니다.
유루복(有漏福)이 모체(母體)가 되어야 무루복(無漏福)을 닦을 수가
있습니다.
또 경을 수지(受持)한다는 것은 그 경의 이치와 도리가
나의 마음 속에 무르녹아서 온전히 나의 본성을 꽃피운다는 것이지만,
실제로 경을 가방에 넣고 다니기만 해도 웬지 마음이 든든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나들이 때나 먼 여행길에 꼭 경을 챙겨 가지고 틈틈이 읽는
태도는 바람직합니다.
혹 바빠서 한구절도 못 일게 되더라도 경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마음
가짐이야 말로 무엇보다도 칭찬받을 만합니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一切諸佛과 及諸佛阿縟多羅三藐三菩提法이
하이고 수보리 일체제불 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皆從此經出
개종차경출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일체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니라."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은 이 경『금강경』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 경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문자(文字)로 표시되어 우리들 눈앞에
펼쳐져 있는 바로 이 『금강경』이겠지만 단순하게 종이와 먹으로 된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옛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한 권의 경이 있으니(我有一券經)
종이나 먹으로 된 것이 아니라서(不因紙黑成)
펼쳐 보아야 한 글자도 없지만(展開無一字)
그러면서도 항상 대광명을 놓고 있네(常放大光明)"
그렇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경, 우리 모두 똑같이 갖고 있는 경에서
모든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이 나왔습니다.
우리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참 면목 자리에서 모든 부처님과 모든 깨
달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곳은 한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요, 우리들의 사량 분별(思量
分別)이 이르지 못하는 자리요 입정한 그 소식이요, 텅 빈 자리인 것
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 저 한 권의 경이 있으므로 겁낼 것도 초조행할 것도
없습니다.
설사 남이 나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서운하게 돌아선다고 하여도 조금
도 상처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떠한 일이라도 오너라, 나에게는 저 빛나는 한 권의 경이 있다.
천개의 태양과도 맞먹는 광명(光明)을 놓고 있는 나의 경이 있다.
하는 신념으로 이겨내고 용서하는 것이 반야 보살(般若 菩薩)의 걸림
없는 본분이라 하겠습니다.
須菩提야 所謂佛法者는 卽非佛法이니라
수보리 소위불법자 즉비불법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고 하는 것도 곧 불법이 아니니라."
부처님께서는 방금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이 만고에
빛나는 이『금강경』으로부터 나왔다고 해 놓고선는 저 자부심을 싹
쓸어버리십니다.
참으로 귀중하게 불법과 인연을 맺고 불법과 더불어 하루하루 살아
가는 우리들에게 의아심을 줄지 모르지만 불법이라 하는 것도 불법이
아니다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어떠한 연기에도 걸리지 않으느로 경이 불법은 낼 수
있지만 연기나 본성을 어쩌지는 못합니다.
철판에 뭔가를 가득 써 놓았다면 더 이상 철판의 구실을 할 수 없지요.
철판을 깨끗이 닦아야 다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불법을 불법이 아니라고 할 때 진정한 불법을 만날 수 있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깨달음이 한껏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번 부처님의 크나큰 자비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깨달음을 성취하였으면서도 우리들
에게 그것을 부정해 보이는 것은 어떠한 종교의 창시자도 그 어떤
성자(聖者)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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