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得無說分 第七
제7분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음
부처님이 부처로서 우리들에게 크게 부각되는 이유는 바로 깨달음 때문
입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면 우리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고
부처님의 탄생(誕生)이나 열반(涅盤)이 높이 평가되지 못할 것입니다.
6년 간의 고행(苦行) 뒤에 납월(臘月) 8일(八日) 새벽, 샛별을 보고 정각
(正覺)을 이루신 까닭에 우리들의 둘도 없는 큰 스승으로 존중받는 것입
니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었으니 당연히 설법, 교화가 따랐습니다.
'횡야설 수야설(橫也說 竪也說)'이라 하여 49년 동안 하루도 영일없이
말씀으로써 중생 교화에 힘썼습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우리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게 되고 그 은
혜에 의해 더나은 삶의 길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스스로는 "나는 도(道)를 얻은 바도 없고, 법(法)을 설한
바도 없다." 라고 철저하게 반야의 거울에 비추어 말씀하십니다.
須菩提야於意云何오如來가得阿縟多羅三藐三菩提耶아如來가 有所說法耶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여래 유소설법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는가.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하는가."
우리들은 무엇을 하든지 마음 속으로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할 것이 없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이해는 합니다.
그렇지만 누겁(累劫)속에서 살아온 습관과 업력(業力) 때문에 그래도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생각 정도가 아니라 우리들 의식 속에 형상으로 완전히 굳어져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생.로.병.사(生.老炳.死)의 근본 문제를 해결코저 피나는 노력
끝에 성도(成道)하시고 긴 세월 동안 설법으로써 중생을 교화(敎化)한
것이 사실입니다.
수시 설법과 300여 회의 격식을 갖춘 법회를 통한 가르침은 팔만대장경
(八萬大藏經)으로 집대성되어 만 권(萬券)가까이 되는 책으로 남아
우리들에게까지 그 공덕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결과로서 부처님의 설법에 의해 불교가 성립되었지만
반야(般若)의 입장에서 볼 때 과연 깨달음과 방편상 해야 하는 설법의
문제를 어떻게 보고 알아야 하는지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須菩提가 言하사대 如我解佛所說義컨댄 無有定法名阿縟多羅三藐三菩提며
수보리 언 여아해불소설의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亦無有定法如來可說이니
역무유정법여래가설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 뜻을 알기에는 아뇩다라삼
먁삼보리라고 이름할 만한 결정적인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가 설하였다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수보리는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 뜻을 알기에는'이라고 공손하게 대답합
니다.
이 말 속에는 부처님게 대한 지극한 존경이 담겨있고 또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고 바로 부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게 답하는 좋은 태도입니다.
인류사에 있어서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은 위대한 일이 어디 있으며 부처
님의 교화와 같이 사실 우리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일이 어디 또 있겠습
니까.
그런데도 수보리는 태도는 공손하지만 "반야의 광명(光明)으로 비추어 보
고 스승인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만한 고정된 법도 없고
따라서 부처님의 설법도 없는 것이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제자가 스승과 한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러한 것은 다른 권위적인 종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불교는 왜 이리 경전도 많고 무슨 가르침이 이다지도 많은가 하고
처음 접하는 분은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
또 조금 더 불교와 가까워지면 배울 것이 많고 배우는 것이 재미있어서
평생(平生)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야의 칼날에서 비추어 보면 고정된 깨달음이나 고정된 설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何以故오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며 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이니
하이고 여래소설법 개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 없으며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속하여 제자 수보리의 입을 빌어 부처님의 뜻인 무상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상식으로 알고 있는 불법 차원이 아닌 진리 차원에서
보는 불법은 가질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은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버려지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취부득 사부득(取不得 捨不得)'입니다.
불법을 보고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라고 하니 참으로 진퇴양난입
니다.
내어 보아라 하여도 내어 놓을 것도 없고 그러면서 없는 것도 아니고
분명히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또 있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결정코 ~한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것입니다."
논리에 맞지 않는 말 같지만 눈을 뜬 사람이 언어(言語)라는
한정된 도구를 빌려서 표현하려니 이렇게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초월(超越)한 말이 가슴에 얼른 와닿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라도 외워 자꾸 음미하다 보면 언젠가는 '아, 불법이란 이런 것이다.
정말 이런 것이다'하며 가슴을 울릴 때가 있게 됩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부처님 찬탄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들 인생
을 다져 왔지만 불법의 실체에 있어서는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
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다."라고 아는 것이 불법을 참으로 바로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그 쪽으로 마음이 열려 있으면 언젠가는 지견
(知見)이 열릴때가 있을 것입니다.
所以者何오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以有差別이니이다
소이지하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현상이 다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엇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금강경』의 본 뜻을 잘 나타내므로 사구게만큼이나 널리
인용되고 있습니다.
모든 눈뜬 사람, 마음의 눈이 밝게 열린 사람은
'해도 함이 없는 법'으로 차별을 둔다 라고 합니다.
이것은 온갖 가르침, 온갖 경전이 모두 함이 없는 한 가지 법의 한 마음
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차별에 매달릴 것이 아닙니다.
차별(差別)이라고 하니 우선 초기 불교 교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삼승(三乘)을 위해 각각 근기에 맞는 방편을 설하셨습니다.
성문(聲聞)을 위해서는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사성제(四聖諦)를
설하셨고 연각(緣覺)을 위해서는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
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의
십이인연(십二因緣)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보살들을 위해서는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
선정(禪定).반야(般若)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 덕목을 주셨습니다.
그 사람 사람의 수준에 따라 나열했지만 사실은 한맛입니다.
그것은 했으되 함이 없는 도리, 즉 무위법(無爲法)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제각각 부처님의 별의별 그물코에 다 걸려 있습니다.
"나는 불교가 무엇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방생 갈 때 재미있더라.
동참금 조금만 내면 가만히 앉아서 공기 좋고 경치 좋은데 가서 착한 일
할 수 있으니."
"나는 후손도 없이 돌아가신 삼촌 제사 지내는 데에 불교가 필요하더라."
"나는 절하는 것이 그저 좋더라."
"나는 염불 삼매에 빠지는 것이 흐뭇하더라."
하는 식으로 나름대로의 방편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각자 개인의 취향과 관심사와 수준에 따라 분별되는 것이지만 결국은
불교라는 근본 그릇 속에 다 포함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뿐만 아니고 우리들 개인의 의식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들은 눈, 귀, 코, 혀,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온갖 것들을
낱낱이 분별할 뿐만 아니라 의식 작용도 끝없이 끝없이 자아냅니다.
하루 동안에 일으키는 마음 작용을 다 정리해 놓으면 아마도 팔만대장경
만큼이나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현실적으로 삶을 펼쳐가는 것은 가지가지 차별적인 것
입니다.
이와 같이 하루 동안에도 많고 많은 분별을 하고, 심지어는 지금까지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자아내고 또 앞으로도 끝없이 계속 자아
내겠지만 그것이 나온 근원자리를 찾아보면 도저히 찾을 길이 없습니다.
도대체 그 근원자리에는 얼마나 많고 많은 마음의 양이 있기에 이렇게도
낱낱이 차별하는 의식을 벌일수 있나 하고 찾아보려면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는 석가도 달마도 찾을 수 없습니다.
"토끼의 뿔을 베어 오라."
"거북이의 털을 가져오라."고 하면 구해 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원래로 토끼는 뿔이 없고, 거북이는 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하나의 오차도 없이 작용을 하게 하는 힘, 그 근원자리를 찾으면
찾을수록 없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의 노력과 깨달음이 부족하여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텅
비고 적적(寂寂)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없는 것도 아닙니다.
없다면 아예 의식 작용이 생기는 것조차 못하니까요.
그러니 분명히 있기는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히 의식 작용이 흘러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물건이 아니므로 무한히 계속하여 작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 무한히 펼쳐지게 하는 그 자리, 본질적으로 고요하고
텅 빈 바로 그 자리가 무위법(無爲法)일 것입니다.
그 자리 외에 무위법이 있다면 무위법이 아닙니다.
있는 자리이니 유위법(有爲法)이 됩니다.
유위법은 없앨 수 있고, 없어지는 법입니다.
없어질 수 없고 없앨 수 없는 무위법이므로 얼마든지 그 어떤 것도 나올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거기 바로 그 무위법에 근거를 두었기에 어떠한 경전도 설할 수
있었고 팔만 대장경도 설해질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근본 생명체에서 전개되는 오묘한 실상을 보고 가르침을
남김없이 펴셨지만 그 근본자리를 들여다 보니 아직도 무궁무진한 진실이
많이 남아 있어서 천지가 끝날 때까지 말을해도 다 하지 못할 것 같았습
니다.
그래서 하루는 나무 밑에서 쉬고 계시다가 손에 나뭇잎을 훑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제자여, 내 손 안에 있는 나뭇잎 수는 얼마나 되겠는가?"
"5~6개 정도입니다."
"그러면 저 나무에 달려 있는 나뭇잎의 수는 얼마이겠는가?"
"나무에 달려 있는 나뭇잎의 수는 너무나도 많아 도저히 샐 수가 없습니
다."
"내 설법도 그러하다. 내가 그 동안 진리를 설한 것은 내 손안에 있는
나뭇잎의 수와 같고, 아직도 설하지 못한 그 자리에 있는 설법은 저 나무
에 달려 있는 나뭇잎 수와 같다."
이와 같이 우리들 진실 생명 자리에는 엄청난 힘과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런 엄청난 힘은 석가, 달마와 같은 성현이라고 해서 더 많은 것이 아니
고 우리들 중생이라고 해서 적은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똑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무위법의 실체를 이와 같이 바로 알고 계발하여 쓴다면
상상으로 요량할 수 없는 힘이 나옵니다.
진실로 우리들이 갖고 있는 무위법의 힘은 천 개의 태양보다도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