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나눔의 쉼터/中要 6 經典集

금강경 강의 . 正信希有分 第 六

靑 波 2003. 7. 29. 14:59
 
    正信希有分 第 六 제6분 바른 믿음은 회유하다 우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좋아하여 믿고 따르나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드뭅니다. 더 더욱 이렇게 다양하고 빠르게 변하가는 이 시대에 있어서 올바른 믿음을 갖기란 참 으로 힘들고 귀합니다. 부처님께서 진리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드러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어렵고 희유한지도 모릅니다. 법(法)에, 나아가 법 아닌 것에도 매달리지 않고 무한히 자유롭게 자신의 내면을 꽃피워 가는 보람은 진실로 즐거운 일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저 것은 부처가 아니다. 그러므로 눈앞에 있는 저 모든것 은 다 부처이다." 이와 같은 이치를 바로 알고 바로 믿는 것은 정말로 기쁘고 희유(希有)한일입니다.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頗有衆生이 得聞如是言說章句하시옵고 生實信不잇가 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언설장구 생실신부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서 진실한 믿음을 내오리가?" 이와 같은 말씀이란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제5에서 말한 제일 사구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若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입니다. 수보리는 그 당시 보통사람들의 의식수준을 대변하여 부처님께 의문나는 점을 여쭈어 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상이 분명히 있는데 허망하고 덧없다고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모양다리 너머에 부처가 있다니 그렇게 볼 안목을 가진 사람 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왜 이런 말을 수보리가 하였느냐 하면 초기 불교 당시에는'있다'즉'상(相)'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괴로움(苦)이 있고, 괴로움의 원인(集)도 있으며, 괴로움의 소멸(滅)도 있으며,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道)도 있습니다. 이렇게 있는 것을 있다고 하는 사상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과 잘 통하여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한 시대 상황에서 아무리"모든 상이 있는 것은 허망하다. 상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 부처이다."라고 하여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있다'는 의식을 깨뜨리기 위해 21년간이라는 긴 세월 동안 600권의 반야부를 설하셨습니다. 사실 그동안 하도 많이 들어와서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무색성형미촉법 (無色聲香味觸法)을 쉽게 말은 하지만 마음 깊이 공감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버젓이 우리의 육신이 있고 온갖 마음 작용이 다 있는데 "형상은 허망하고 없는 것이다." 하는 것을 누가 쉽게 믿으려 들었겠습니까. 수보리가 부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다른 제자들을 위해 그 시대 사라믈의 생각을 대변하여 물은 것입니다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莫作是說하라 如來滅後後五百歲에 有持戒修福者가 불 고수보리 막작시설 여래멸후후오백세 유지계수복자 於此章句에 能生信心 以此爲實 어자장구 능생신심 이차위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여래가 멸도한 뒤 오백세에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이 말씀에 능히 믿는 마음을 내고 이로써 실다움을 삼으리라." 부처님께서는 진지한 구도자로서 문제를 제기하는수보리에게 안심을 시킵니다. 부처님이 생존하셨던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부처님이 열반(涅攀)에 드신 뒤 제 오백년, 즉 25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계(戒)를 지니고 복을 닦아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말을 듣고 상 너머에 있는 진실을 이해하여 청정한 신심을 내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계(戒)의 기본 원형은 불 법승(佛法僧)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수행하는 데 있습니다. 대체로 부처님 열반 후 오백년 단위로 묶어 오백년이라고 합니다. 제 일 오백년은 해탈(解脫) 견고, 제 이 오백년은 선정(禪定) 견고, 제 삼 오백년은 다문(多聞) 견고, 제 사 오백년은 탑사(塔寺) 견고, 제 오 오백년은 투쟁(鬪爭) 견고 시대로 합니다. 불교 역사를 볼 때 부처님 생존시나 열반 후 오백년까지는 마음의 해탈을 얻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뒤에는 선정에 드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인도의 달마(達磨) 대사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고 우리 나라에도 선풍(禪風)이 들어 왔 습니다. 그 다음 오백년 동안에는 학문 불교가 발전하여 불교에 관한 사상이 형성되고, 여러 종파가 생기게 되었으며, 경도 많이 간행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로 치면 통일신라 시대, 고려 시대에 해당 되겠습니다. 사찰에서 간행한 사간 장경(寺刊 藏經)이나 나라에서 대대적으로 힘을 기울여 간행한 국간 장경(國刊 裝經)이 지금도 자랑스럽게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뒤에는 불사(佛事)에 치중하여 절 건물을 크게 짓고 값나가는 것으로 장식을 하고 탑이나 불상도 으리으리하게 많이 주조하였습니다. 마지막 오백년인 후 오백세 즉 우리들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투쟁 견고 시대라 하는데 타종교아의 갈등, 불교 내부에서의 분규, 불교 사상 논쟁 등 많은 문제가 표출되 고 있습니다. 이 구분은 어떤 절대적인 잣대가 아니고 대개 시대별의 주류를 이루는 어떤 특징적인 현 상을 말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탑사도 있었고 투쟁도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종제인 제바달다는 부처님 을 항상 괴롭히고 당시의 교단을 분열시키는 등 투쟁을 전문으로 하기도 하였습니다. 투쟁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에도 선정을 닦고 해탈을 이루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것을 흔히들 미래세에 대한 부처님의 예언으로도 간주합니다마는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불교를 믿고 공부해 가는 신행(信行)의 과정으로 제 오 오백년에서 제 일 오백년으로 거슬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투쟁 견고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눈앞의 이해 타산과 오감에만 지극히 집착하여 인과 응보의 원리도 모르고 살아가는 이기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러다가 '이것이 바람직한 나의 삶의 모습일까.또 다른 인생길은 없을까."하는 인생에 근본 문제에 눈을 뜨게 되어 절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절 짓는 데 보시하면 복(福)받는다'하여 열심히 동참합니다. 기와에 이름을 써올리기도 하고 서까래를 맡기도 하는 등 거금을 기꺼이 보시하고는 복 받을 것이라고 흐뭇해 합니다.이렇게 하는 것은 규모는 작지만 개인에게 있어서 탑사인 것입니다. 이런 기회를 여러 번 갖게 되다 보면 '나도 이제 부처님 말씀을 좀 알아야겠다. 또는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일심으로 불러 선정에 들기도 합니다.이 모든 것이 다 좋습니다.이러한 선정이 깊어지다 보면 드디어 생사가 두렵지 않게 되고, 모든 문제와 번뇌, 고통에서 시원하게 벗어나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자유자재한 해탈의 경지를 맞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當知是人은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에 而種善根이라 已於無量千萬佛所에 당지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 이종선근 이어무량천만불소 種諸善根하야 聞是章句하고 乃至一念生淨信者니라 종제선근 문시장구 내지일념생정신자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나 두 부처나 셋, 넷, 다섯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오랫동안 또는 한 순간만이라도 개끗한 믿음을 내는 사람이니라." 요즈음 삼천불 혹은 만불을 모셔 놓은 법당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 부처, 두 부처 내지 천만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꼭 조건과 격식을 갖 추어 법당 안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이나 경전에 명기되어 있는 부처님들만을 말하는 것 이 아닙니다. 범어로 된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첫머리가 '일체지자(一切智者)에게 귀의합니다. 〔나막 사르바 진야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일체지자가 바로 한량 없는 천만 부처님입니다. 소견이 트이고 깨달아서 참된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모두가 부처이 고 지자입니다. 우리들 곁에서 우리들 마음의 밭을 일구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이 바로 나의 선지식(善知識)이고 부처님입니다. 이런 소견으로 널리 부처님을 구하는 것이 우리 대승(大乘)학인들의 도리라 할 것입니다. 모든 선근(善根)을 심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진리와 착한 인연을 맺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금강경』을 배우고 외우는 공덕도 우리들이 미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과 거 어느 순간에 여러 선지식을 극진히 잘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른 믿음을 만나 이해하고 도반과 함께 부처님의 깊은 뜻을 음미하는 희유(希有) 한 공덕을 얻게 된것은 옛날에 우리들이 지어놓은 공덕의 결과인 것입니다. 須菩提야 如來가 悉知悉見하나니 是諸衆生이 得如是無量福德이니라 수보리 여래 실지실견 시제중생 득여시무량복덕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렇게 한량없는 복덕을 얻느니라." 한 부처, 두 부처, 한량없는천만 부처님 처소에 선근(善根)을 심은 모든 사람과 또 이 모 든 사람들의 행복과 공덕 그 인생의 가치와 보람을 부처님께서 다 알고 다 보고 있습니다. 흔히들 정의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외롭고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여기거나 의기소침해질 필요가 없어요.여래(如래來)가 다 알아 줍니다. 법당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나, 3000년 전에 이 땅에 둘도 없는 큰 스승으로 오셨던 석 가모니 부처님께서 알아 주시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가까이 있는 바르게 눈뜬 사람은 다 알아 줍니다.설사 알아 주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조금도 실망할 필요가 없 습니다. 자기 자신이 그 가치와 보람을 이미 잘 느끼고 있고, 또 자신이 지어 놓은 공덕 이 다른 사람에게 옮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달리 누가 알아 주고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하여 서러움이나 외로움을 느낄 필요 가 조금도 없습니다.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며 無法相하며 亦無非法相이니 하이고 시제중상 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무법상 역무비법상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중생은 다시 아상, 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으며 법 아니라는 상도 또한 없느니라." 지금까지 우리 모든 중생들이 고쳐애 할 병통으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사상( 四相)을 이야기해 왔는데 여기서 두 가지의 상이 더 첨가됩니다. 그것은 '법이라는 상〔法相〕'과 '법 아니라는 상〔非相〕'입니다. 나라고 하는 데에 대한 집착과 고정 관념, 남이다 하는 데에 대한 내 나름데로의 인식, 이런 틀에 박힌 생각은 정말 옳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중심으로 판단한 것이지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아니다'를 고집하는 것은 ~이다에 집착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바 없는 것입니다. 법상과 비법상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게 되면 그야말로 『신심명(信心銘)』의 한 구절 처럼 "원동태허 무흠무여(圓同太虛 無欠無餘), 원만하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이 없고 남음도 없도다."하는 경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허공처럼 툭 트여서 크고 시원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若心取相하면 卽爲着我人衆生壽者니, 何以故오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착아인중생수자 하이고 若取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며 若取非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니라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게 되나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법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며, 만약 법 아닌 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니라." 평형(平衡)을 이루고 있는 저울에 파리 한 마리가 앉아도 균형이 깨어져 저울이 기울어 집니다. 그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이 어디에 조금이라도 기울면 상을 취하게 되어 편견 (偏見)이 생깁니다. 사실 알고 보면 중생들이 겪는 아픔이나 상처, 심지어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 (葛藤)은 집착을 떠나서 생기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금강경』 은 시종일관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고 시원스럽게 살것을 가르칩니다. 是故로 不應取法이며 不應取非法이니 시고 불응취법 불응취비법 "이러한 까닭으로 응당 법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응당 법 아님도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옛날, 시집가는 딸에게 흔히 일러주는 말로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 하지 말라."얼핏 들으면 상식에 맞지 않는 말 같지만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 니다. 좋은 일을 하지 말랬으니 좋지 않은 일은 말할 것도 없이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법상도 취하지 말라고 하는데 비법상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불법을 통하여 사상(四相)은 어느 정도 극복이 되어 큼직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예기치 않았던 법상이라는 병통이 생깁니다. 이것은 사상(四相)보다 심각합니다. 以是義故로 如來가 常說호대 汝等比丘가 知我說法을 如筏喩者라하노니 이시의고 여래 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法尙應捨어든 何況非法이리오 법상응사 하황비법 이런 까닭으로 여래가 항상 말하길, "너희들 비구는 나의 설법을 뗏목으로 바유함과 같 음을 알라고 하노니 법도 오히려 은당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 아님이겠는가." 우리 중생들은 가지가지 집착이 생기는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항상'말씀하십니다. 자신의 기분이 평소와 다르거나 제자가 잘 못 알아들을 때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가르 침을 편 뒤에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깨달아 가르치는 말씀을 뗏목처럼 알라는 것 입니다. 강을 건너는 데에 꼭 필요하고 또 너무나 고마웠다고 하여 강을 건너고 난뒤에도 계속 하여 소중하다고 무거운 뗏목을 어깨에 메고 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중교는 "나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어라. 나를 길로 알고, 빛으로 알며 진리도 알아라. 나 의외의 것은 결코 신봉해서는 안 된다."하는 권위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부처님 스스로 "내 설법을 뗏목처럼 알아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몇십 년 동안의 긴 세월을 갠지스 강 유역을 기점으로 하여 교화 활동을 펴셨읍니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함게 자주 이용한 뗏목을 비유로 들면 제자들이 쉽게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조그만 것에도 세심하게 배려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