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나눔의 쉼터/中要 6 經典集

아함경 13. 이는 苦의 滅이다 2

靑 波 2002. 12. 3. 07:37
    13.이는 고(苦)의 멸(滅)이다 "여기에 물통이 있어서 물이 가득 채워져 있다 하자. 그러나 만약 그 물 이 불에 데워져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든지, 또는 이끼나 풀로 덮여 있다 든지, 또는 바람이 쳐서 물결이 일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은 그 물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있는 모습 그대로 볼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이 탐욕으로 어지러워진다든지, 노여움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든지, 또는 어리석음이나 의심으로 덮여 있다든지 할 때에는 무엇이거나 여실히 명석하게 관찰하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 경에서 붓다가 설한 가르침이었다. 이것을 더 추상적으로 나타내면 객체와 주관 사이에 여러 잡스러운 요소 가 개재함으로써 '망령됨'이 생기는 것이어서, 그것을 불교에서는복(覆;덮 는것) 또는 애(碍;장애가 되는 것)라고 일컫는다. 이런 개재물을 남김없이 떨쳐 버리고 맑은 주관을 가지고 객체를 대하는 것, 그것이 "망령됨을 떠나는 일" 이며, 그 때 일체의 존재는 진상대로 주관에 의해 받아들여지 고, 주관에 의해 선택, 분별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실 지견(如實知見) 이요, 무애(無碍)의 정견(正見)이다 . 다시 말하면 이것이 언어로 표현될 때 '정어'가 되고, 행동으로 나타날 때 '정업'이 되는 것이다. '바른 것' 의 둘째 조건은 "전도(顚倒)를 떠나는 일"이다. 여기서는'정견'이 기초 가 되므로 그것에 적용시켜 말한다면 "전도의 견(見)이 아닌 것을 정견 이라 한다."고 할 수 있다. 전도란 관찰과 판단에 임해서 그 순서가 엇바뀌고 진상을 놓치는 일이다. 대(大)와 소(小)를 거꾸로 아는 것도 그것이요, 미와 추를 잘못 판단하는 것도 그것이다. 붓다는 일찍이 이런 게를 설한일이 있다. 법에 의해 이익을 얻지 못함과 비법(非法)으로 이익을 얻는 그것은 어느 쪽이 낫다고 하여야 하랴. 법대로 행하여서 얻지 못함은 비법으로 얻음보다 훨씬 나아라. 깨달은 것 적으면서 높은 명성과 깨달은 것 많고도 낮은 명성은 어느 쪽이 낫다고 하여야 하랴. 지혜가 많고도 낮은 명성은 적고도 높음보다 훨씬 나아라. 그것이 바른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는 자칫하면 "비법으로 이익을 얻는 일"에 몰두하기 쉽고, "지혜가 적으면서 명성이 높기"를 바라기 일쑤이다. 그리하여 이런 전도된 사고 방식은 인생의 모든 영역을 채워 버려서 사람들을 미망과 죄악 속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이런 것을 '사전도'라고 한다. 이것은 불교의 입장에 서서 인간이 빠지기 쉬운 잘못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첫째, 상(常)전도- 무상한 존재를 영원한 것인 양 잘못 생각하는 것. 둘째, 낙(樂)전도-고(苦)라고 보아야 할 이 인생을 즐거운 것으로 잘못 생 각하는 것. 셋째, 정(淨)전도-이 부정한 인간 존재를 청정한 것인 듯 잘못생각하는 것. 넷째, 아(我)전도-이 무아(無我)인 존재를 자아가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 하는 것. 그리고 이런 전도가 생기는 이유를 추궁할 때, 결국은 탐욕과 노여움과 어 리석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이런 장애물을 불식하여 이 전도에서 떠나지 못한다면, 마침내 '정(正)'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조건이 되는 것은 "극단을 떠나는 일"이라고 지적된다. 한역 경전의 표현을 따른다면 "가를 떠나 한 가운데에 서는 일(離邊處中; 이변처중)"이다.앞에서 인용한 첫 설법에 "비구들이여, 출가한 사람은 두 극단을 피해야 하느니라." 고 나와 있던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극단'이 라고 번역한 것은 팔리어로 말한다면 anta(끝,가)인바, 한역에서는 편(偏) 또는 변(邊), 단(端)이라고 번역되었다. 이 '변'을 떠나'중(中)'에 서는 곳에 '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가지고 '정(正)'을 규정한다는 것은 다른 데서 그 유례를 찾 을 수 없는 매우 불교적인 사고 방법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아마도 붓 다의 절실한 체험으로부터 이런 조건들이 생겨났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체험이란 붓다가 정각을 이루기에 앞서 온 힘을 기울여서 고행에 매진 하던 일을 말한다. 일단 택하고 나면 그것에 대해 미심쩍은 일이 있든 말 든 그것을 끝까지 밀고 가려 든다. 우리의 처지에 알맞은 융통성 있는 입 장이라는 것은 웬지 기회주의처럼 생각되어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어느 극단으로 달리는 것은 인간의 약함을 숨기려는 행동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붓다 조차도 한때는 이런 인간적인 약점에 사로 잡 혀 있었다는 것을 붓다의 전기는 우리에게 똑똑히 밝혀 주고 있는 것 이다. 고행에 열중하여 그것으로 길을 타개하려고 했던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이윽고 고행에 매달리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님을 자각하여 경연히 그것을 버렸던 것이지만, 그 체험이 이제 여기에 '정(正)'의 조건 으로서 알려진 것은 아니겠는가. 한 경([잡아함경] 9:30:20 억이. 팔리 어 동본, [증지부경전] 6:55소나) 은 이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 있는 문답을 전해 주고 있다. 붓다의 제자 중에 소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아주 엄한 수행을 계속했건만 아무리 해도 깨달을 수가 없었다. 도리어 망상만이 일 어나서 그를 괴롭혔다. 그것을 아신 붓다는 그를 찾아가서 물으셨다. "너는 집에 있을 때, 무슨 일을 잘했느냐?" "대덕이시여, 거문고를 좀 뜯 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소나야, 거문고 줄을 아주 팽팽하게 죄면 어 떻더냐? 켜기에 좋더냐?" "대덕이시여, 너무 팽팽하면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소나야, 아주 허술하게 하면 어떻더냐?" "대덕이시여, 그리해 도 안 되나이다." "소나야, 네 말대로다.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거나 너무 허술해서는 좋은 소리를 내지 못할 것 이다. 도(道)의 실천도 그와 같으니라.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에 설 때 바른 실천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것이 불 교의 실천의 핵심이 되는 이른바 '중도'의 가르침이다. 이리하여 '팔정도'란 이런 여러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바르게 보는태 도(정견),바른 행위(정사, 정어, 정업), 바른 생활(정명), 바른 수행(정정 진, 정념, 정정)임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