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이는 고(苦)이다.2
그 두 번째는 "이것이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라고 되어 있다. 더 단적으
로 말한다면 "이는 고의 발생이다."라는 명제다. 이것에 대해 앞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제1명제에서 제2명제로 옮아가는 과정이다.
거기서는 '무엇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고가 있는 것일까?'라는 설문이 있어
서 그 두 가지 명제를 연결시키고 있다. '연기의 공식'의 전반이 질문의
형식으로 양자 사이에 개재됨으로써 그 둘을 결합시킨 것이다. 물론 사제
설법의 말씀에는 그것이 나타나 있지 않으나, 정각 이후에 붓다가 펼친
논리에는 언제나 이 공식이 자유 자재로 구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설문에 대해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고가 있다."고 대답하
는 것이 이 제2명제인 것이다.
그러면 그런 고(苦)를 있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갈애라고 대답
되어 있다. 갈애(渴愛)라는 말의 원어는 팔리 어로 말한다면 tanha인데,
그것은 원래 '목마름'의 뜻이어서 목마른 이가 물을 바라 마지않듯이 사납
게 타오르는 욕망의 작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갈애란 그 원어의 뜻을 살리
고자 매우 애쓴 역어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 붓다가 그 말에 부여하고 있는 뜻이다.
그것을 따져 볼 때 이 말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매우 미묘하고 중대한 뜻
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이제까지 좀 소홀하지 않았던가 싶다. 붓다가 욕망에
대해 언급할 경우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그대로
보아 넘긴 점이 없지 않다고 생각되는 까닭이다.
갈애 라는 말의 쓰임새도 그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단적으로 말해서 붓다
는 결코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부정한 것은 그 지나치게
사나운 작용이었다.
또는 이런 가르침은 완전히 비인간적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 적도 있
다. 그러나 깨닫고 보면 그것은 전적으로 오해임이 밝혀진다.
첫째로 욕망 자체는 '무기(無記)'라고 보는 것이 붓다의 입장이었다.
고 이해된다. 무기란 '선악을 구별하기 이전의 상태'라는 뜻이다. 붓다는
욕망 자체를 일괄해서 그것을 선이라든지 악이라든지 단정한 적은 없던 것
이다. 만약 그렇게 단정했다면 그것은 도리어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누구나 식욕이라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 식욕에 따라 음식을 먹게 된다. 그리하여 적당히 먹어서 몸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디로 보나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먹
어 도리어 몸을 손상시킨다면 그것은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또는 자신의 식욕을 채우기 위하여 남의 것을 뺏아 먹는다고 할 때, 그것
또한 나쁜 행위라고 하여야 될 것이다. 그러기에 욕망 자체는 무기라고 할
수밖에 없으며, 그 작용에 따라 처음으로 선악의 판단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소부경전] '자설경(自設經)' 6:8 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
던 것이 생각난다.
"고행만이 청정한 행위라는 생각은 하나의 극단이다. 욕망에 아무 나쁜
점도 없다는 생각 역시 하나의 극단이다."
금욕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욕망을 악이라고 보기 때문이려니와 붓다
는 이 입장을 배격하였다. 고행을 포기한 것이 그 증거이다. 쾌락주의에
빠지는 것은 욕망을 선이라고 보는 것이겠으나, 붓다 는 이런 입장도 취
하지 않았다. 출가의 단행이 무엇보다도 뚜렷한 그 증거이다.
이 두 가지 태도로 볼 때, 욕망에 대한 붓다의 견해는 '무기(無記)' 였다
고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욕망을 언급하며 그 지나친 작용을 경계 할
때 붓다는 언제나 신중하게 그 용어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탐
욕이라는 용어가 그것이다. 이것은 원래 raga라는 원어를 번역한 것으로
'붉음(赤)' 또는 '연소'를 뜻하는 말이다. 그것을 붓다는 불꽃처럼 타오
르는 맹렬한 욕망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한역에서는 이것을 '탐(貪)'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거니와,그 원어의 뉘
앙스는 일단 상실된 채로 그래도 아직 욕망의 지나친 상태를 나타내고 있
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여기에서 갈애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도 또한 이런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붓다는 이런 괴로움을 있게 하는 조건으로 갈애를 지적하고, 그것
에 대해 간명한 해설을 베풀어 갔다. 그 해설도 다시 두 부분으로 가를 수
있다. 갈애의 상황을 말한 것과 그 종류를 열거한 부분이 그것이다.
먼저 그 첫째 부분에 대해서는 "후유(後有)를 일으키고 기쁨과 탐심을 수
반하며 이르는 곳마다 그 것에 집착한다." 고 설명했다.
이 중에서 "후유를 일으키고"라는 말은 현대인의 표현으로는 쉽게 나타내
기 어려운 뜻을 내포하고 있다. 후유라는 말은 내생에서 윤회를 되풀이하
는 존재라는 뜻이어서, 결국은 미망(迷妄)의 인생을 반복한다는 정도의 뜻
이다. 그리고 그 씨(원인)가 되는 것이 다름 아닌 갈애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이르는 곳마다 그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이것을 한역에서는 "희탐구행(喜貪俱行) 수처 환희(수處歡喜)"라고 했다.
그 대상을 가리지도 않고 욕심을 내어서 그칠 줄을 모르는 상태를 말한
것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을것이다.
그리고 둘째 부분은 "그것에는 욕애와 유애와 무유애가 있다."고 되어있다.
그 하나는 성(性)에 관한 욕망(욕애), 둘째로 지적된 것은 개체 존속의 욕
망(유애), 셋째 것은 명예, 권세에 대한 욕망(무유애)인바, 이 분류 방법
은 오늘에서도 근본적으로는 정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어쨌든 붓다는 여기에서 괴로움을 생기게 하는 조건을 발견하여 그것 을
상세히 검토하였다. 그러면 그 조건이 되는 갈애를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이 셋째와 넷째의 성제(聖諦)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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