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靑波 作品/寺刹.관광.맛집

지리산 삼사순례(칠불사.천은사.실상사)

靑 波 2002. 6. 28. 23:06
    지리산 삼사순례(七佛寺.泉隱寺.實相寺) 二九 蓮華會가 처음으로 주최한 사찰 순례는 2002년 6월 28일 교육대학 앞에서 모여서 대형 버스를 빌려 지리산 방면으로 출발했다. 당시 경전 반에서'六曹壇經'工夫를 하고 있던 때인데도 예상 밖으로 회원 들이 많이 참석하지를 않았다. 지리산 초입인 하동군 화개면에 들어서서 쌍계사를 오른쪽으로 두고 얼마 간을 들어간 뒤 가락국 사찰이라는 칠불암으로 가는 데는 험한 산길을 가 파르게 굽이굽이 돌아서 오를 때는 다 함께 불경을 외우며 부처님께 안전 을 기원하기도 했다. 칠불암은 지리산 토끼봉의 해발고도 830m 지점에 있는 사찰로, 101년 가락 국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수행하다가103년 8월보름 날 밤에 성불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지리산 최고의 심산유곡에 자리 잡아 수많은 고승을 배출하였으나,1800년 큰 화재가 나서 보광전, 약사전, 신선당, 벽안당, 미타전, 칠불상각,보설 루,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불탔다가 복구되었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을 거쳐 6·25전쟁 중 다시 불탄 뒤 1978년에 복구 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칠불사가 되었다. 운공선사가 축조한 벽안당 아자방(亞字房)은 세계건축대사전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독특한 양식으로, 서산대사가 좌선한 곳이자 1828(조선 순조 28) 대은선사가 율종을 수립한 곳으로 유명하다. 아자방은 신라 때 금관가야에서 온 구들도사 담공선사가 만든 온돌방으로, 방안 네 귀퉁이에 70cm씩 높인 곳이 좌선처이며, 가운데 십자모양의 낮은 곳이 행경처이다. 한번 불을 지피면 49일 동안 온기가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일곱 왕자를 성불시킨 보옥선사는 거문고의 명인이었으며, 신라 경덕왕 때는 옥보고가 입산해 50년간 30곡의 거문고곡을 지었다고 한다. 범어사에서 미리연락을 해두어 스님이 법당에서 사찰의 설명과 간단한 법 문을 해주는 편의를 제공받기도 하고 가는 곳마다 불교대학 성지 순례 온 우리 일행을 불편함 없이 입장시켜주었다. 칠불사의 예불을 마치고 내려오다 이곳 계곡의 휴식처를 만들어 둔 곳에서 준비해간 점심공양을 하고, 다시 두 번째 방문사찰인 지리산 구례군에 속 하는 천은사를 향하였다. 통일신라 828년(흥덕왕 3)에 덕운선사(德雲禪師)와 인도에서 온 승려 스 루가 창건하였고,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이름을 감로사(甘 露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졌다고 한다. 그뒤 875년(헌강왕 1)에 보조선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중축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에는‘남방 제일 사찰’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인 1610년(광해군 2)에 혜정대사가 중수하고, 1679년(숙종 5)에 단유대사(袒裕大師)가 복원하였는데,1773년(영조49)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1775년에 혜암이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어 불탄 뒤 중건할 때, 샘에 큰 구렁이가 자꾸 나타나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泉隱寺)라고 바꾸자 그 뒤로 원인 모를 화 재와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절을 지키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 이라고 두려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서 일주문 현판으로 걸었더니 그 뒤로 재앙이 그쳤다고 한다. 천은사에서 지리산 노고단 조금 못 미친 휴게소에서 산 아래로 내려다보는 풍광은 크고 작은 산들이 겹겹이 쌓인 모습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산허리로 흰 구름이 지나가는 광경을 보고는 지리산의 높음을 느낄 수도 있었다. 남원시 산내면(山內面)의 지리산(智異山) 기슭 평지에 있는 사찰 인 실상사(實相寺)는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창건은 통일신라시대인 828 년(흥덕왕 3) 홍척(洪陟)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데 서비롯된다. 선종(禪宗)이 처음 전래된 것은 신라 제36대 혜공왕(惠恭王) 때인데, 발전을 못하다가 도의(道儀)와 함께 입당(入唐), 수학하고 귀국한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이 흥덕왕의 초청으로 법을 강론함으로써 구산선 문 중 으뜸 사찰로 발전하였다. 도의는 장흥(長興) 가지산(迦智山)에 들어가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곳에 실상사를 세워 많은 제자를 배출, 전국에 포교하였는데 이 들을 실상사파(實相寺派)라 불렀다. 그의 제자로 수철(秀澈) 편운(片雲) 두 대사가 나와 더욱 이 종산(宗山)을 크게 번창시켰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어 약200년 동안 승려들은 부속암자인 백장 암(百丈庵)에서 기거하다가, 조선 제19대 숙종 대에 이르러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 을 세웠다. 그러나 1882년(고종 19) 사찰 건물이 소실되는 수난을 겪고, 다시 여러 승려들의 힘으로 중건되어 현재에 이른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3층 석탑을 비롯하여 십여 점의 보 물이 있다는 것이다. 단청을 하지 않은 빛바랜 전각의 약사여래불이 인상적 이였는데, 이곳 주 지스님은 먼 곳에서 온 우리일행을 반갑게 맞으며 긴 시간동안 법문을 들 려주셨다. 연못에는 연꽃이 곱게 피어있고, 실상사의 解憂所는 다소 특이하게 되어있 었는데 이곳 사찰의 넓은 밭의 거름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실상사를 나와 입구 가게에서 청암거사와 마신 동동주 맛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올 때와 같이 천수경을 비롯해서 반야심경 등등을 염송하면서 오는데, 거기다 지루함을 들게 해준 범어사 합창단원인 般若眼 (연변)보살의 '우리도 부처님같이'같은 찬불가를 들으며 돌아 올 수 있어 서 다소나마 웃고 즐거운 회향 길이 되었다. 2002년 6월 28일 청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