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靑波 作品/寺刹.관광.맛집

경주 남산답사(삼릉.불곡.탑골.사천왕사지)

靑 波 2001. 10. 2. 22:56

 

    경주 남산답사(삼릉.불곡.탑골.사천왕사지) 경주 남산 삼릉(三稜) 계곡 기슭을 오를 때는 10월 2일 인데도 새벽공기 가몹시 차가워 옷깃을 세우며 300여 미터 가파른 산길을 올라 맨 먼저 보 게 되는 목 없는 석불좌상 앞에서 불교미술 담당이신 崔春郁(최춘욱)교수 님의 설명을 들으며, 생동감 있는 현장 답사 수업은 시작되었다.
      최근까지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동국대학 학생들이 파내어 올려놓은 것 이라 했다. 불상의 가사 끈 등 정교하게 표현되어있었다. 우리나라의 특색 있는 매듭이 신라시대에도 꽤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불좌상 왼쪽 구릉의 경사면에 2.4미터의 거대한 돌기둥 형 암석에 관음 보살 입상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자비스러운 자세로 조각 되어있다. 높이 1.5미터의 관음보살상은 머리에 化佛같은 것이 새겨진 보관을 쓰고 있고 왼손에는 ?甁(정병)을 들고 서있다. 마애관음보살입상의 모습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 정된다는 것이다.
       
        관음상의 남쪽으로 커다란 두개의 암석에 각기 세 불상씩 여섯 불보살상이 선각되어있다. 거대한 두 암석위에는 빗물을 돌리는 홈이 파여져 있고, 기 둥자리가 있어 암석을 덮는 목조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을 둘러보고 육존 불상 앞에서 기념촬영도 하였다. 남산에는 광범하게 석불과 석탑이 산재해있어 하루에 모두 둘러보기에는 무리가 되므로 다시 하산하여 선방골 아래의 보물63호인 삼존불입상 흔히 三體石佛이라는 빙그레 웃는 모습의 석불이 있는데 오래전에는 흩어져 있 던 것을 1923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라는데, 전에 볼 때와는 달리 불상 밖으로 건물을 세워 건물 안에 모셔져 있었다.
          [佛谷] 경주 남산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 부처골(佛谷)로 얼마간 들어간 곳에 길옆 높이 2.8m 폭 3.5m의 암석에 깊이 0.9m 정도를 파내고 감실을 만들 보물 198호로 지정된 1.42m의 마애불 좌상이 조각되어있다. 한눈에 보기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있는 선정에 든 부처님의 상호로 매우 정교하게 조각되어있다. 이 석불좌상은 제작 시기가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데 감실 앞에 목조건 물이 설치되었을 것으로도 추정되나 주변에 기와조각 외에는 다른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塔谷] 이곳에서 좀더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사각형의 돌기둥 사면에 32구의 불 보살상과 황룡사 9층탑으로 추정되는 모형 등이 조각되어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는 보물201호인 불곡 마애 조상군이 있다. 7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돌기둥은 높이가 10m정도 되는 큰 바위이며 남쪽은 산등성이와 연결되어 높은 대지를 이용한 법당이 있 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이곳에서 발견된 神印寺라는 명문기와를 보아 신인종(神 印宗)사찰임을 알 수 있다. 632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신인종을 유행시 켰던 명랑법사(明朗法師)와도 연관지어지며 사천왕사가 오방신장으로 唐 軍을 물리치고자 했다면 이 神印寺 四面佛은 마군(魔軍)을 항복받아 영토 를 확장하려는 삼국통일의 의지를 표현한 현장인 셈이다. [彌勒谷] 신라인들이 열망했던 이상적인 부처의 모습을 가장 성공적으로 표현했다 고 생각되는 미륵골(彌勒谷) 보리사(菩提寺) 에는 전체높이 4.36m 불상 높이 2.4m인 보물136호인 석불좌상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8세기 중엽의 석굴암 본존상보다 다 소 진전된 9세기 양식으로 당대의 역작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또한 불상 후면에는 약사불 좌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같은 배면불의 형 태는 유래가 드물어 주목되는 점이다.
               
                우리일행은 서출지가 있는 통일전 앞에서 각자 준비해간 점심공양을 하고 사천왕사지로 향했다. 서기674년 2월 김인문(金仁門) 으로부터 당나라 50만 대군이 신라를 침입 할 거라는 말을 전해들은 의상대사가 즉시 귀국하여 문무왕 에게 이 사실 을 알렸고, 문무왕은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물었다. 이에 명랑은 낭산(狼山) 남쪽 神遊林(신유림)에 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 을 열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唐軍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할 여유가 없게 되자 명랑은 채백(彩帛 =물들인 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로써 五方의 神像을 만든 뒤 유가명승(瑜 伽明僧)12인과 더불어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밀교의 비법)을 썼다. 당나라 군사는 신라에 도달하기 전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모두 침몰 하였다. 그 뒤 5년만인 679년(문무왕 19)에 절을 완성하여 사천왕사라 했다. 선덕여왕이 神遊林(신유림)은 도리천이 있는 곳이라 하여 신성시 하다 죽 으면서 그 곳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선덕여왕이 죽은 지 30여년 만 에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를 짓게 되자 사람들은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 었다. 울산으로 가는 7번국도 옆 낮은 언덕을 이루고 있는 넓은 사천왕사지에는 2기의 머리 잘린 돌 거북과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경주 낭산 능지터
                경주 박물관 동쪽 1km떨어진 울산으로 가는 도로 옆에 위치한 낭산(狼山) 의 서쪽에 능지탑(陵旨塔) 또는 蓮華塔이라 불리는 이탑은 십이지상의 조각이 비교적 정확히 남아있으며, 연꽃을 두른 모습과 옆의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어우러지는 부드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능지탑 주변에서 문무왕릉비의 일부가 발견되고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등이 이웃한 곳으로 보아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할 수 있다. 하필이면 蓮華塔(능지)앞에서 29기인 蓮華會 단체 사진을 찍었다. 참고 : 범불대 불교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