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靑波 作品/寺刹.관광.맛집

사찰순례(김제금산사.고창선운사.부안내소사)

靑 波 2002. 4. 7. 23:09

 

    김제 부안 사찰순례(金山.禪雲.來蘇寺) 2002년4월7일 새벽6시 장전동 지하철 역사 앞에는 범어사 불교대학 총동 문회에서 연례행사로 사찰순례를 가기위해 관광버스 14대가 줄지어 서있 었다. 각 기수별로 차량을 정해 탑승을 하는데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600명이 넘 는 사람들을 태우고 가는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보살들의 화장실 사용 을 한꺼번에 하려니 대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김제까지는 먼 거리 인지라 금산사에 도착하여 금산사 절에서 준비한 점심 공양을 하는데 큰 절의 한쪽이 우리 일행으로 북적대는 대단한 광경을 이 루고 있었다. 공양을 마치고 대적광전에서 법회를 하는데, 넓은 법당인데 도 사람이 너무 많아 모두 들어갈 수 가 없었다. 금산사는 세 번째 간 곳인데도 오랜만에 가서 새로 지은 건물이 많았다.
     
      도솔암 미륵 마애불 금산사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金山面) 모악산(母岳山) 남쪽 기슭에 있는 대사찰로써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을 인용하여 사적기(事蹟記)가 만들어졌는데, 금산사의 창건은 599년 (백제 법왕 1)에 왕의 自福사찰로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전하는 바로는 진표(眞表)가 762년(신라 경덕왕 21)부터 766년 (신라 혜공왕 2)까지 4년에 걸쳐 중건(重建)하였으며, 1069년(문종 23)혜 덕왕사(慧德王師)가 대가람(大伽藍)으로 재청하고, 그 남쪽에 광교원(廣 敎院)이라는 대사구(大寺區)를 증설하여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도 량(大道場)이 되었다. 1598년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미륵전(彌勒殿). 대공전(大恭殿). 광 교원(廣敎院) 등과 40여 개소에 달하는 산내 암자(庵子)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1601년(선조 34) 수문(守文)이 재건의 역사(役事)를 벌여 1635년 (인조 13)에 낙성을 보았다. 고종(高宗) 때에 이르러 미륵전. 대장전(大 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였다.
       
        미륵전(국보 62). 대적광전(보물 476),대장전(보물 827) 등과. 5층석탑 (보물 215).석련대(石蓮臺:보물 23).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보물 24).석종(石鐘:보물 26).6각 다층석탑(보물 27).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28). 등 많은 석조보물이 있다. 버스에서 내려 사찰로 들어가는 모습은 기수깃발을 들고 수학여행온 학생 들 모양으로 줄을서서 걸어가는 광경은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모습이다. 시간에 쫓기고 많은 사람들의 행열에 산만하여 보고 느낌이 머리속에 와 닿기도 전에 사라지는 것이였다.
         
          전북 고창군에 있는 선운사(禪雲寺)는 조계종 24교구 본사로써, 선운사 사적기(禪雲寺寺蹟記)에 따르면 577년(백제 위덕왕 24)에 검단선사(黔丹 禪師)가 창건하였으며, 그후 폐사가 되어 1기(基)의 석탑만 남아 있던 것 을 1354년(공민왕 3)에 효정선사(孝正禪師)가 중수하였다. 1472년(조선 성종 3) 부터 10여 년 간 극유(克乳)가 성종의 숙부 덕원군 (德源君)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는데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본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 창건 당시는 89개의 암자와 189채의 건물, 그리고 수도를 위한 24개소의 굴이 있던 대가람이라고 기록되어있다. 1613년(광해군 5)에는 무장(茂長) 현감 송석조(宋碩祚)가 일관(一寬)·원준(元俊) 등 승려와 함께 재건을 도모, 3년에 걸쳐 대웅전·만세루(萬歲樓)·영산전(靈山殿)·명부전 등을 건립하였다. 이 절은 불교의 기본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왕성해지고, 불립문자(不 立文字)를 주장하던 선종(禪宗)에서도 선리(禪理)를 근본적으로 체계화하 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던 조선 후기에, 조사선(祖師禪)의 본연사상을 임 제삼구(臨濟三句)에 입각하여 해결해 보려고 시도한 불교학자 긍선(亘璇) 이 처음 입산수도한 절이기도 하다.
           
            내소사(來蘇寺)는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鎭西面) 석포리(石浦里)에 있는 사찰로써 633년(백제 무왕 34) 백제의 승려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하 여 처음에는 소래사(蘇來寺)라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 어 있고, 창건 당시에는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내소사는 소소래사이다. 언제 '내소사'로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633년(조선 인조 11) 청민(淸旻)이 대웅전(大雄殿:보물 291)을 지었는데, 그 건축양식이 매우 정교하고 환상적이어서 가히 조선 중기 사찰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1865년(고종 2) 관해(觀海)가 중수하 고 만허(萬虛)가 보수한 뒤, 1983년 혜산(慧山)이 중창하여 현재의 가람을 이루었다. 이 밖에도 고려동종(高麗銅鐘:보물 277),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보물 1268), 3층석탑(전북유형문화재 124), 설선당(說禪堂)과 요사(전북유형문 화재 125) 등 여러 문화재가 있으며, 정문에는 실상사지(實相寺址)에서 이 건(移建)한 연래루(蓮來樓)가 있다.
            사람이 너무 많고 많이 걷다보니 짜증스러워 내소사에서는 절에서 먼저 내려와 다른 버스를 타고 온 아는 법우를 만나 준비해온 곡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금산사를 제외하고는 어느 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조차 기억이 안 날정도 로 고역스런 사찰순례를 한 셈이 되고 말았다. 행사를 하는 사람들의 노고를 모르는바는 아니지만 선거 유세장에 사람을 많이만 동원하듯 가족 들까지 동반시켜 숫자를 늘려 크게 보이려 하다보니 참가한 동문들의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절대 이래서는 안된다. 콩나물 시루속의 콩나물 취급을 받는 것 같은 이런 사찰순례에는 두 번 다시 안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