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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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답사 2.(중생사.황룡사지.사면석불)

靑 波 2001. 10. 3. 12:58

 

    경주 답사(중생사.황룡사지.사면석불) 중생사(衆生寺)는 679년 창건한 신라 고찰로 기도 영험을 얻은 사람이 헤 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는 전설과는 달리 아직도 寺勢가 약한지 1940년에 지었다는 작고 허름한 법당 과 두 채의 건물 마당에 자갈이 깔려있는 초 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신라 말의 최은함(崔殷?)은 관음보살상 앞에서 기도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석 달이 채 되지 않아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을 처 들어와 부득이 아들을 관음상 앞에 두고 피난을 갔다 보름 만에 찾아오나 아이는 생기가 있고 입에서는 젖 냄새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아이가 고려 초기 대학자 최승로(崔承老 927~989)이다. 또한 절에 불이 나자 법당에서 나와 스스로를 지켜낸 신령스러운 존재이기도 하였다. 또 992년(고려 성종 11)3월 이 절의 주지 성태(性泰)스님께서 가난하여 절 을 떠나려하며 보살화상께 아뢰자 꿈속에 성인이 나타나 떠나지 말라 며 시주를 약속한다. 13일 후에 김해에서 온 사람들이 쌀 여섯 섬과 소금 네 섬의 시주를 말과 소에 싣고 절을 찾는다. 시주 나간 이 없다며 성태가 거절하자 법당의 관 음보살 화상이 바로 시주 받으러 오신 스님이었다고 말한다. 1173년(명종 3)에는 한 승려가 글을 모르는 주지 점숭(占崇)스님을 쫓아 내고 자신이 주지직을 맡으려고 조정에서 나온 관리에게 모함을 했으나 점숭스님이 축원문을 거꾸로 들고도 잘 읽어내자 관리는 “이 스님은 관 음대성이 보호하는 분”이라며 주지로 그대로 절에 머물게 했다고 한다. 중생사에 있었던 관음보살상은 중국 吳나라의 장승요라는 화공에 의해 만 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황제의 명으로 황제가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는 중에 붓을 잘못 떨어뜨려 배꼽에 빨간 점을 찍었는데,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칠 수가 없었다. 화공은 이 점은 날 때부터 있던 점일 것이라 생각하고 황제에게 여인의 그림을 바쳤더니, 황제는 그림을 보고 배꼽 밑에 있는 점은 속에 감추어 진 것인데 어찌 그릴 수 있냐며 화공을 의심하고 죽이려 하였다. 이에 한 신하가 화공의 사람됨이 어질고 곧은 것을 밝히고 용서해줄 것을 아뢰자 황제는 한 발 양보하여 자신이 어젯밤에 꾼 꿈속의 사람을 그려서 바친다면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화공이 십일면관음보살의 상을 그려 바치고 목숨을 구하였다. 그 후 그 화공은 신라에 와서 중생사의 관음보살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유물은 마애지장삼존불(보물 665호) 석탑 등이 있는데, 석조 관음보살상 은 불두가 없으며 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굴불사 사면석불은 경덕왕이 백률사로 가기위해 경주 금강산 아래에 이르 렀을 때 땅 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땅을 파게 했더니 사면불이 새겨진 돌이 나왔다. 그 곳에다 절을 짓게 하고 굴불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법흥왕은 외국을 다녀온 사신들을 통해 불교의 중흥을 듣고는 반드시 불 교를 받아들여 국제사회에 손색없는 나라로 성장하려는 욕망을 품는다. 이는 종증조부인 눌지왕 이래 김씨 왕들의 숙원사업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배타적이고 보수성이 강한 신라 사람들이 크게 반발하여 시끄럽 게 떠들자 가까이 모시던 신하인 이차돈(異次頓)이 자신의 머리를 베어 뭇 사람의 반대를 진정시키라고 한다. 이에 법흥왕은 본래 불도를 일으키려는 일인데 죄 없는 사람을 죽인다면 잘못이라고 하며 이를 듣지 않자 이차돈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불법을 위해서 형벌을 받으러 나가니 부처님이 만약 신통력이 있 다면 내 죽음에 반드시 남다른 일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차돈의 목을 치자 피가 솟구치는데 빛이 희어서 젖과 같 았고 잘려진 머리가 떨어진 곳이 백률사 뒤라고 전하는데,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서 다시는 불사(佛事)를 헐뜯지 않았다는 이 얘기는'삼국사 기'권4 법흥왕 본기 법흥왕 15년(528)전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고려 고종 때 각훈(覺訓)이 지은'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석법공 (釋法空; 법흥왕의 법명)전에는 더 상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법흥왕이 불법을 일으키기 위해 크게 가람을 세우고 불상과 설비를 갖추 려 하자 대신 공알(恭謁) 등이 이렇게 간했다. "요사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편안치 않고 더하여 이웃나라 군사들이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는데 어느 겨를에 백성들을 수고롭게 부역시켜 쓸데없는 집을 짓겠습니까." 왕은 신하들이 따르지 않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16년(529)에 내사사 인(內史舍人) 박염촉(朴厭觸, 이차돈 혹은 (居次頓이라고도 한다)이 26세 의 의혈(義血)청년으로 왕의 큰 뜻을 돕기 위해 이렇게 은밀하게 아뢴다. "큰 성인의 가르침은 천신(天神)이 받드는 바이라 만약 소신을 목 베면 마땅히 하늘과 땅에 이변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변이 일어난다면 누가 감히 어기고 오만하겠습니까." 현재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백률사 육면 석당비(栢栗寺六面石幢碑) 마멸이 심하여 비문 내용은 대부분 알아보기 어려우나, 다만 제1면에 목 이 떨어져 나가며 흰 피가 솟구쳐 오르는 광경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어 이차돈 순교 장면을 표현한 것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법흥왕 16년(529)에는 살생을 금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21년(534)에 는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의 조영에 들어가며 국왕은 스스로 출가하여 법공(法空)이라는 법명(法名)을 가지고 이 절에 주석한다. 드디어 진흥왕은 14년(553)2월에 월성의 동쪽(현재 절터를 보면 북쪽임) 에 신궁을 크게 짓기 시작하는데, 황룡(黃龍)이 그 땅에서 보이므로 왕은 왕궁터가 아니라고 생각해 이를 고쳐서 佛寺로 삼고 황룡사(皇龍寺)라 이 름을 내린다.]삼국유사'권3 황룡사장륙(皇龍寺丈六)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분황사 앞에서
    황룡사는 짓기 시작한 지 17년 만인 진흥왕 31년(570)에 완공한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바다 남쪽으로부터 큰 배 한 척이 들어와 하곡현(河
    谷縣, 지금 울산)사포(絲浦; 또는 谷浦)에 정박하였다.
    그 배는 사람이 타지 않은 황당선(荒唐船)으로 통첩문에 다음과 같이 씌
    어 있었다.
    서천축국 아육왕(阿育王)이 황철(黃鐵구리) 5만7000근과 황금 3만푼(分)
    을 모아 석가삼존상을 만들려 하였는데 이루어지지 않아서 배에 실어 바
    다에 띄우며 이렇게 축원한다.
    '원컨대 인연 있는 국토에 닿아서 장륙(丈六 =4m에 해당함)의 존귀한 모
    습을 이루소서.'그리고 모본으로 삼을 1불 2보살상을 함께 싣는다.
    현의 관리가 이 사실을 장계로 아뢰니 칙명을 내려 그 현의 성 동쪽 (現
    울산 남목)에 동축사(東竺寺)를 지어 그 모본으로 삼을 삼존불을 맞이해
    봉안하게 하고 그 금과 구리는 서울로 실어와 장륙삼존상을 주성(鑄成;
    부어 만듦)하여 황룡사에 봉안하게 하니, 때는 진흥왕 35년 (574) 갑오
    3월이었다(절의 기록에는 계사년 573년 10월17일이라 돼 있다). 주존 석
    가 입상은 무게가 3만5007근이고 황금 들어간 것이 1만198푼이었으며 양
    대 보살상에 들어간 구리는 1만2000근, 황금은 1만136푼이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권4 진흥왕 35년 조에도 간략하게 요약돼 있다.
    그러나 이 황룡사 장륙전 봉안의‘석가삼존상’은 고려 고종 25년(1238)
    윤 4월에 몽고 군사들이 황룡사를 불지를 때 함께 타 녹아버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길이 없다. 동축사에 모셨던 본불도 황룡사 장륙존
    상이 이루어진 다음 황룡사에 모셔다 봉안했었다 하니 이 역시 황룡사가
    불타 없어질 때 함께 녹아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인도 불상 출현이 紀元 前後 時期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기원전 3
    세기경에 재위했던 아육왕(Asoka, 서기전 269∼232년)이 불상을 만들게
    한 배가 800년 동안을 인도에서 신라까지 바다에 떠다녔다는 것은 이해
    하기 어려운 이야기라 하겠다.
    어쨌든 황룡사지의 광활한 넓은 터에 웅장하게 서있었을 장륙존상을 상상
    할 때 석양이 깃드는 옛 절터에 서서 설명에 열을 올리는 교수님의 목소
    리마저 한층 우렁차게 들렸다.
    분황사에서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고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서
    '하루의 신라인'이 되어 열심히 현지답사로 불교 미술공부를 마치고 돌아
    오는 차 안에서도 쉽게 흥분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참고 : 범불대 불교 미술   2001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