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10. 내재하는 방해물 2
그런 악마 이야기는 붓다가 최초의 설법에 성공하고 마침내 60명에 이르
는 제자들을 전도 여행에 떠나 보낼 때 다시 나타나게 된다.
그들을 보냄에 즈음하여 붓다는 "비구들아, 자,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
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고 격려한 끝에 여러 가지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붓다의 '전도 선언'이라고 부른다.
그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상세히 언급한 바 있거니와, 그 '전도 선언'이 있
은 직후, 마라 (악마)의 소리는 다시 붓다에게 속삭였다.
[상응부 경정] 4:5 '계제(係蹄)'의 이야기이다.
우스워라, 그대는 이 세상에서 악한 이의 올가미에 걸리고 말았도다.그대
는 악마의 사슬에 매였나니 사문이여, 그대는 자유를 잃었도다.
이에 붓다도 게를 설하여 대답했다.
나는 진정 이 세상에서 악한 이의 올가미를 벗어났도다. 나는 악마의 사슬
을 풀어 버렸거니 파괴자여, 그대는 패하였도다.
생각건대 이제 설법을 결심했다는 것은 다시 또 자기 생애에 중대한 의무
를 부과했다는 것이 된다. 모든 구속에서 가까스로 해탈한 지금,그것은 또
하나의 속박이 되지 않으랴. 이런 새로운 불안이 붓다의 머리를 스치고 지
나갔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이 악마이야기는 이런 불안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대승 불교가 전하는 악마 이야기(붓다
와 관계되는)와 아함부에 나타난 악마 이야기는 그 시기 설정이 매우 다
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대승에서는 그것을 모두 붓다의 성도(成道)이
전의 일이라고 기록했으며, 정각 이후의 붓다는 완전히 악마의 시련으로부
터 벗어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즉 붓다의 인간성이 아함부의 여러 경전과
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붓다가 이미 인간보다 훨씬 높은 절대자로서 인식되어,그 인간성
은 아주 희박해진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기에 정각 이후의 붓다와 악마를
관련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함부에 보이는 악마 이야기는 주로 정각 이후의 붓다에 관련되어
있다. 앞에 든 두 개의 설화가 다 그렇거니와, 그 밖의 것들도 예외가 거
의 없다. 하기야 정각 이전의 붓다 에게야 말로 더 많은 심중의 불안과 고
민이 있었을 터이고, 따라서 악마 이야기의 형식으로 표현해야 될 많은 소
재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아함부의 여러 경전들은 주로 정각
이후의 언행과 사상에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함부의 이런 이야기는 바로 붓다 그분의 풍부한 인간성의 표현이
되므로, 우리에게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이런 악마 이야기를 통해서 보면 붓다도 때로는 식욕의 유혹을 받기도 했
도, 어떤 때는 수면의 유혹과도 싸워야 했던 모양이다. 다쳐서 누워 계셨
을 당시에는 붓다의 만년에 데바다타(提婆達多)가 반역했을때 무엇인가 불
안을 느낀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또는 여러 사람들을 상대로 법을 설하다
가, 갑자기 이래서 될까 하는 불안을 느낀 적도 여러 번 있었던 모양이다.
'악마 상응'의14'적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나는 들었다. 어느 시절 세존께서는 코사라 국 에카사라(一葦)라는
바라문 마을에 계셨다. 거기서도 역시 세존께서는 많은 재가 신도들을 상
대로 법을 설하셨다. 그때 악한 이 마라는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사문 고타마는 대중에게 에워싸여 설법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디 내가 가서 여러 사람을 속여 줄까?"
그래서 악한 이 마라는 세존 앞에 나타나 게를 가지고 말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법을 설함은 현명한 그대의 할 일 아니니 그대여, 그 짓
을 굳이 하여서 탐심과 노여움에 매이지 말라.
세존은 그것에 대답하셨다.
남의 이익과 동정을 위해 깨달은 사람은 가르치나니 탐심과 노여움을 여
래는 진정 이미 모두모두 해탈했노라.
그때 악한 이 마라는 "세존은 나를 알고 있다. 나를 간파하고 있다."고
하면서 괴로워하고 의기 소침해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 경전이 전하는 붓다의 설법자 로서의 태도를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이것 역시 악마 이야기의 형식으로 표현되었으니까,우리는 그 표현을 넘어
서 붓다의 심중을 살필 필요가 있으려니와, 여기에서 발견되는 붓다의 설
법 태도는 다른 종교인들의 그것과는 썩 다른 면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거칠게 부르짖는 예언자의 태도가 아니다. 지나친 자신감으로 무반
성하게 엮어 세우는 설교 태도 또한 아니다. 자기는 과연 이 사람들에게
설법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것에 정말 어울리겠는가, 또는 탐심이나 노여
움에 사로잡히는 일은 없겠는가,
이런 인간다운 불안이나 반성이 마음에 오고 간다는 것은 도리어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붓다
야 말로 그런 설법자 였음을 이 이야기가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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