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9. 현실적으로 증험(證驗)되는 것 2
두 번째의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라는 표현은 흔히 '즉시
적(卽時的)' 혹은 '현생적(現生的)'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것은 과보
즉 성과가 나타나는 시기에 관한 문제이다. 만약 붓다가 설한 것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것이었다면, 그 성과는 그것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리
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또 그것이 내세 왕생(往生 ;천상세계에 가서
태어남.)에 대한 가르침이었다면, 그 과보는 유명을 달리하는 날까지 기다
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때를 격하지 않고 바로 현재에 과보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행히 이
에 관해서 언급한 경이 있다. [상응부 경전]에 '우파바나'라는 것이 있는
데, 거기에서 우파바나 라는 제자가 그것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대덕이시여, 현생 인 법, 현생 적인 법합니다만, 대체 어떤 것이 현생
적인 법이겠습니까?"
이에 대해 붓다는 인간의 감각 기관과 그 대상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생기
는 집착을 보기로 들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파바나여, 여기에 한 사람의 비구가 있어서 눈을 들어 무엇을 보았다
하자. 또 그는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염심(染心 ; 악에 의해 더러
워진 마음.)을 일으켰다고 치자. 그때 그는 스스로 반성함으로써 '아, 내
속에 염심이 있구나.'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파바나여, 그것이 현생 적인 법이니라. 우파바나여, 그런데 여기에 또
한 사람의 비구가 있어서 눈을 들어 무엇을 보았다 하자.그러나 그는 그것
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염심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치자. 그때 그는
자기 마음을 돌아보고 '아 나에게는 염심이 없구나.'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파바나 여, 이것이 현생 적인 법이니라."
붓다와 그 제자들의 관심사는 결국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였다
고 할 수 있다. 자연을 변화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전환시키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정신을 차려서 돌아보기만 한다면 자기의
상태를 똑똑히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집착을 안고있는 내 마음의 움직
임과 집착을 떠난 내 마음의 편안함이 그대로 이해되기 마련이다.
미망으로 뒤덮여 있는 마음의 어둠이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에 의해
홀연히 개어 가는 모습도 알 수가 있다. 이런 모양을"어둠 속에 불을 가져
와"라고 설했던 것이겠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을 '현생적', '즉시적'이
라 하고, "때를 격하지 않고"라고 한 까닭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 번째는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직역하여 '내견적
(來見的)'이라고도 하거니와, 그 뜻하는 바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
더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열려 있는 진리'라는 정도의 뜻이다. '열려 있
는 진리'에 대립하는 것은 '닫혀 있는 진리'이다. 세상에는 이미 그것을
믿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종교도 많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담의 신화를 믿는 이가 아니면 원죄 사상은 이해되지
않을 것이며, 무량수경에 보이는 법장 비구(法藏比丘 ; 아미타불이 보살
행을 닦을 때의 이름. 그는 이 때 48대원을 세워 수도한 결과, 서방 극락
정토를 건설하여 그 부처가 되었다고 함.)의 서원을 믿지 않는다면 염불
왕생은 도저히 납득할수 없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열려있는 진리'이므로 합리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붓다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또 누구라도 실천함으로써 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내용이었다. 결코 계시
에 의지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든지, 신앙의 힘에 매달리지 않으면 얻어
질 수 없다든지, 또는 이방인에게는 베풀 수 없다든지 하는 그런 제한은
없었다. 허심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귀를 기울인다면 누구에게나 이해되는
내용이었으며, 편견을 떠나 눈을 들어 본다면 있는 그대로 인식되는 가르
침이었다.
그러기에 "와서 보라."고 이를 수 있는 것이며, 만인 앞에 '열려 있는 진
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네 번째에는 "잘 열반에 인도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더 원문대로 번
역한다면 다만 '잘 인도하는 것'이 되지만,어디에 인도하는 것이냐 할 때
열반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열반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그것이
야말로 붓다가 설정한 궁국의 목표요, 인간의 이상인 까닭이다. 인간은
대체 무엇이고자 원하고 있을까? 또는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일
까? 이에 대해서는 저마다 생각이 있을 터이므로 그 생각하는 내용도
각기 다양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현세에서의 번영을 이상으로 그리
며 산다. 어떤 사람은 내세에 위안을 찾으려고 들기도 한다.
상천(上天)이니 왕생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제 붓다가 가리
키는 목표는 '열반'이라고 표현된다. 그것은 닙바나(nibbana, Pali)또는
니르바나(nirvana, SKt.)의 음사인바, 마음속에서 타고 있는 격정의 불꽃
이 꺼진 상태를 뜻한다. 이 말로 붓다는 마음속에 어지러움이 없는 자유롭
고 평화로운 경지를 가리킴으로써, 그것을 인간의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잘 인도하는 것"이라는 구절은 붓다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인도하
여 이런 이상을 실현시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생각건대 만일 붓다가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라는 것이, 다른 종교가들이
흔히 그러하듯 내세의 복지에 관한 것이었다고 하면, 그것은 도저히 "현실
적으로 증험되는 것"이라거나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라거나
또는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을 터이다.
불교의 긴 흐름을 돌이켜 볼 때, 그런 내세설이 주장 된일 도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붓다의 사상에는 그런 요소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목소리를
높여 확언하고 싶다.
다섯 번째로 지적된 것은 "지혜 있는 사람이면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자각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붓다와 우파바나의 문답에서도 나타나듯이 스스로 내심의 동향
을 살펴본다면, 내 마음에 번뇌가 있다, 또는 내 마음에 번뇌가 없다고 자
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또 내재하는 방해물이 나타나서 마음을 교란시킨다면, 고요히 반성함으로
써 그 상황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붓다가 가르친 방법에 따라 그 방해물을 없앤다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구나 자각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적어도 붓다의 제자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
이라는 말은 붓다의 가르침이 이런 것이었음을 나타낸다.
만약 모든 종교의 내용을 분류하여 자각의 길과 구제의 길로 나눈다면,
말할 것도 없이 붓다의 가르침은 자각의 길에 속하며 그 가장 전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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