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나눔의 쉼터/中要 6 經典集

아함경 2. 正覺

靑 波 2002. 10. 10. 13:11

 

    2. 정각.(正覺) 일구월심 사유하던 성자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진 그 날 그의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 연기(緣起)의 도리를 알았으므로. (『自說經』 1:1 菩提品)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는 마가다 국에 머물면서 7년 동안이나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 하고자 온갖 정성을 다 바쳤다. 그런 끝에 라자가하(王舍城) 에서 그리 멀지않은 우루베라의 네란자라 강(尼連禪江)기슭에 있는 핍파라 (pippala) 나무 밑에서 마침내 그는 크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이런 인연 으로 말미암아 그 나무를 보리수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깨달음을 보리수 밑의 정각(正覺) 또는 대각 성취(大覺成就)라고 일컫는다. 그것은 그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와 아울러 불교의 모든 흐 름이 그 순간에 결정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 졌는가? 또 어떤 사상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가? 무릇 불교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 다도 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이제 새로운 시각에서 구명해 가고 자 한다. 여기에서 취택한 한 경전(자설경)은 그 결정적 순간의 그의 모습과 생각 을 묘사한 다음 앞에 든 운문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 그 운문을 될 수 있 는 대로 직역해 놓았거니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열심히 사유하는 성자에게 삼라 만상이 그 진상을 드러냈을 때 의혹이 모두 사라졌다는 점 이다. 주의해서 읽어보면, 여기에 불교의 진리에 대한 견해가 명료히 나타 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무명(無明)이라는 말을 음미 해 보자. 이 말의 원어는avijja 이며, 그것은 무지 미망을 나타내는 말이거니와, 그것을 표현하는데 무(無)를 뜻하는a와 명(明)을 뜻하는vijja를 연결했다는 것은 무지(無智)란 곧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후세의 불교 문헌들은 이런 생각을 광명이 오면 어둠이 사라진다.는 비 유적 표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테면『사십이장경(四十二章輕)』의 일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대저 도(道)를 봄은 마치 횃불을 가지고 어두운 방 에 들어갈 때, 그 어둠이 없어지고 광명만이 남는 것과 같으니라." 또 후세의 선승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지관 타좌(只管打坐; 선종의 말. 오직 앉는 것뿐이라는 뜻. 즉 좌선에 임해서 깨닫겠다든지 무엇을 해결하 겠다든지 하는 노력을 떠나, 무심히 그저 앉아 있을 때 그 것이 도리어 참된 경지가 된다는 뜻.)하여 신심 탈락(身心脫落 ; 몸과 마음에 대한 집 착을 완전히 떠나는 것.)할 때,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서(도홍유록(桃紅 柳綠)에서 나온 말; 진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바로 진리라는 뜻.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말.)삼라 만상은 그 진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 내 보인다고 한다. 이런 것이 불교를 일관하는 진리 관이다. 이것은 고독한 사색가가 그 머 리 속에서 얽어 낸 종류와는 다르다. 또는 흥분한 예언자가 갑자기 하늘 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과도 다르다. 오직 사람이 아무것에도 가리어지지 않은 눈을 뜨게 될 때, 일체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 그 진상을 우리의 눈앞 에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법 실상(諸法實相 ; 모든 존재의 진 실한 모습.)이며, 이것이 불교의 진리관 이거니와, 이런 진리의 관념은 결 코 불교만의 것은 아니다. 그리스 사상가들이 말하는 진리의 관념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들은 진리를'알레테이나(aletheia)'라는 말로 나타냈다. 그것은 '덮여 있는 것(letheia)'에 부정의 접두사'a'를 붙인 것이어서,덮여 있지 않은 것을 뜻한다. 거기서도 역시 가려 있지 않은 존재의 진상이야말로 진리라고 생각되었음 이 분명하다. 그러면 대체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는 어떻게 함으로써 가려 지지 않은 눈을 얻었고, 어떻게 함으로써 존재의 진상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도 과거에는 보리수 밑의 결정적인 순간에만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7년에 걸친 긴 수행 기간을 별로 돌아보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새로운 시각으로 이것을 구명해 보겠다고 하는 것은 마지막의 크나큰 해결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시 한 번 이 장기에 걸친 수행을 돌아보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