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나눔의 쉼터/中要 6 經典集

아함경 4. 첫 설법(初轉法輪)

靑 波 2002. 10. 16. 23:33

 

    4. 첫 설법(初轉法輪) "비구들아, 출가한 이는 두 극단에 달려가서는 안되나니, 그 둘이란 무엇 인가?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함은 어리석고 추하다. 범부의 소행이어서 성스럽지 못하며 또 무익하니라. 또 스스로 고행을 일삼음은 오직 괴로울 뿐이며, 역시 성스럽지 못하고 무익하니라.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中道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눈을 뜨게 하 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寂靜 ; 마음에 번뇌가 끊어져 고요하고 편 안한 모양.)과 증지(證智 ; 중도와 참다운 지혜를 체득하는 것.)와 등각 (等覺 ; 붓다의 깨달음은 평등하다는 뜻.)과 열반(涅槃)을 돕느니라. ([相鷹部經典] 56:11. 漢譯同本, [雜阿含經] 15:17 轉法論) (상응부경전) (한역동본) (잡아함경) (전법론) 보리수 밑에서의 명상은 계속되었다. 그러는 중에서 붓다가 다시 생각한 것은 주로 다음의 두 가지였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저 내증(內證), 즉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내용을 표현하는 일, 더 적절히 말한다면 그것을 설법하기 위해 조직하고 체계화하는 일 이었을것 이다. 그런 이야기는 경전의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깨달음의 사상적 내용인 '연기의 법칙'과 최초의 설법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던 '네 가지 진리(四諦)'를 비교할 때, 얼른 보아 이 두 가지 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붓다는 겨우 설법할 결심이 서서 처음으로 사람들을 향해 법을 설했을 때,자기의 깨달음의 내용을 결 코 그대로 말한 것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그것은 주도한 배려에 의해 조직되고 체계화되어, 이른바 '네 가지 진리' 로서 제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런 조직은 언제 이루어졌던가? 그것 또한 보리수 밑에서의 명상 중에, 아마도 설법의 결의가 서고 난 다음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연기의 법칙'과 '네 가지 진리'의 관계 즉 전자가 어떻게 조직됨으로써 후자의 체계를 이룰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것은 바 로 불교의 전 체계의 기초를 이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붓다의 가슴에서 오고 간 둘째 생각이란 어떤 것이었던가? 그것은 먼저 누구를 향해서 이 법(진리)을 설할 것이냐 하는 문제 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설법할 첫 대상자의 선택이다. 앞에서도 이미 나온 바와 같이 이 법은 심심 미묘하고 또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 에, 걱정이나 無知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을 것 이다. 그것이 걱정인 까닭에 붓다도 자주 설법을 주저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빨리 이해하여 줄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첫 설법의 상대, 그 지명은 먼저 아라라 카라마 위에 떨어졌다. 그는 일 찍이 붓다가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옛 스승이었다.그 스승이 라면 반드시 이해하여 주려니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알아보았더니 그 사람은 이미 죽고 난 뒤였다. 실망한 붓다는 역시 예전의 스승이던 윳다카 라마푸타를 생각했던 것이나, 그도 또한 죽었음이 판명되었다. 이리하여 옛 스승과의 재회는 끝내 실현되지 않았거니와, 그것은 당시의 붓다의 심경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먼저 설법의 상대로 옛 스승 을 택했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따뜻한 이해를 기대한 것이었는지 도 모른다. 자기가 깨달은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 받고 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 또한 후세의 불교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터무니없는 억측이라고 할 는지도 모른다. 붓다의 확고한 신념은 이미 보리수 밑에서의 정각에서 확 립된 것이라고 질타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함부의 여러 경전이 말하는 붓다의 인상은 결코 그런것이 아니다 붓다는 결코 경솔하게 확신해 버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신령에 충만하여 포효하는 사람과도 성격이 달랐다. 검토에 검토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확 신을 가지고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붓다의 사람됨이었다. 더욱이 당시의 붓다는 아직 서른 다섯 살밖에 안 된 젊은이였음을 생각해 야 한다. 비록 크나 큰 해결은 이미 이루어졌을 망정, 그것을 내세우면서 천하에 군림할 자신은 충분하게 서 있지 않았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 은 없다. 그러나 흔들림 없는 확신과 절대적인 자신은 얼마 안 가서 확립되기에 이 르니, 처음으로 한 설법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을 적이 그때였다. 최초의 설법이야말로 붓다 에게는 가장 큰 시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옛 스승 두 사람이 다 죽었다는 것을 안 붓다는 생각 끝에 친구들을 설법 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경전은 언제나 그들을 가리켜서 '다섯 비구'라고 했거니와, 그들은 일찍이 붓다가 고행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여러 가지로 붓다를 도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붓다가 고행을 포기하는 것을 보고는 경멸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나 타내면서 그의 곁을 떠나버린 사람들이기도 했다. 붓다는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그들이 지금 바라나시(波羅捺)의 교외 이 시파타나 미가다야(鹿野苑)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붓다는 곧 보리수 밑을 떠나 바라나시로 갔다. 우루베라에서 바라나시까지 는 250킬로미터가 넘는다. 오직 법을 설하기 위해 떠났던 것이니 붓다가 이 첫 설법에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 이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