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결

나눔의 쉼터/中要 6 經典集

아함경 5.四聖諦 2

靑 波 2002. 10. 23. 23:43
    고집멸도(苦集滅道) 맨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이는 고(苦)이다." 또는 "고 의 성제이다."라는 명제였다. 이것은 과제의 제시이다. 인생의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 제이다. 여기서는 생, 노, 병, 사, 즉 사고(四苦)가 모든 사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법구경]의 게(128)를 가지고 말한다면 이렇게 된다. 하늘 위에 오르고, 바다 밑에 잠기고 산골짜기 깊숙한 동굴 속에 숨는대도 죽음의 검은 손이 미치지 않는 그런 곳은 이 세상에 있음 없어라. 그것뿐이 아니다. 미워하는 사람과도 만나야 한다(怨憎會苦). 사랑하는 사 람이라도 헤어질 때가 온다(愛別離苦). 또 채워지지 않는 욕심도 허다하다 (求不得苦). 우리의 일상 생활이란 괴로움으로 뒤덮여 있지 않은가! 붓다는 이런 현실에 갑자기 생각이 미쳤을 때,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저 크나큰 포기(출가)를 감행했던 것이다. 이런 현실 위에 "이는고(苦)이다."라는 제1명제가 세워지기에 이른 것이다. 두 번째로 제시된 명제는 "이는 고의 발생이다." 또는 "고의발생의 성제이 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런 인생의 현실을 통찰한 다음, 그 발생의 이 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일이다. 그것은 얼른 보기에 저항할 길 없는 운명인 듯이 생각된다. 그러나 만약 거기에서 멈추고 만다면 우리는 무력한 운명 론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대체 그것 을 극복할 방법은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것이야말로 붓 다가 목숨을 걸고 추구했던 문제였다. 그리고 그의 크나큰 깨달음이 이 수 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물음은 연기의 법칙, 즉 일체의 존재는 어떤 조건(인연)에 의 해 이루어졌고, 따라서 자아(自我)니 실체(實體)니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 는다는 원리에 의해 훌륭히 해결이 났던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깨달음의 경지에서 볼 때 인생을 괴롭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이 갈애 (渴愛,tanha), 즉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것에나 비겨야 할 불타는 욕망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제시된 것은 "이는 고의 멸진이다. " 또는 "고의 멸진의 성제이다. "라는 명제이다. 인생이 욕망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괴로운 것이 되고 말았 다면 무엇으로 이런 우리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것에는 오직 한 가지 방법, 불타는 욕망을 가라앉히는 길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세 번째의 문제이다. 붓다란 그런 분이며 불교란 그런 종교인 것이다. 그것을 후세의 불교인들 은 "불교에는 불가사의가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붓다 이전에 이 당연한 이치에 눈뜬 사람이 있었던가? 평범하다면 평범하지만, 위대한 평범 이라 고 아니할 수 없다. 본래 진리란 그런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 하다고 하는 것이 우리네 범부라면,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 는 것이 진리요 깨달음인 것이겠다. 네 번째로 제시된 것은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또는 "이것은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라고하는 명제다. 이것은 실천론이다. 제3의 명제에 의해 수립된 원칙에 입각하여 고(苦)를 없애기 위한 실천 방 법을 보인 것이 제4의 성제이다. 그 내용은 이른바 성스러 운 여덟 가지 정도(八正道, ariyo atthangiko maggo),즉 정견(正見),정사(正思), 정어 (正語), 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이며, 이것들은 모두 전장(前章)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극단을 떠나 중도 (中道)에 입각하는 실천, 곧 관찰(정견)과 행위(정사, 정어, 정업)와 생활 (정명)과 수행(정정진, 정념, 정정)에 관한 여러 항목을 열거한 것이다. 미가다야(鹿野苑)의 나무 그늘에 앉아서 붓다가 다섯 비구에게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 '네 가지 성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들이 결코 그들 다섯 비구에 의해 대번에 이해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 지 않는다. 낡은 문헌(이를테면 [중부경전]26성구경)의 기록도 그런 사실 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다. "이리하여 두 명의 비구에게 설명 할 동안은 다른 셋이 나가서 탁발하여, 세 사람의 비구가 탁발해 온 것을 가지고 여섯 명이 살아갔다. 또 세 명의 비구에게 가르치고 있을 때는 두 사람의 비구가 탁발하여, 그 들이 얻어 온 것으로 여섯이서 생활했다." 이런 생활이 며칠이 지나자, 다 섯 비구의 한 사람인 콘단냐(僑陣如Kondanna)가 그 사상 체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경전은 그것을 "콘단냐는 먼저 티 없는 청정한 법안(法眼 ; 바른 이치를 보는 눈) 을 떴다." 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본인에게도 기뻤으려니와, 아마도 그 이상으로 좋아한 이는 붓다 그 사람이었을 것이다. "콘단냐는 깨달았다, 콘단냐는 깨달았다!" 그때의 붓다의 말씀을 경전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 말 가운데는 이제껏 혼자서 가슴속에 지니고 있었던 깨달음의 내용을 가까스로 남에게 이해시킬 수 있 었던 붓다의 무량한 감개가 함축되어 있는 듯이 느껴진다. 그로부터 콘단냐는 '안냐타 콘단냐(Annata Kondanna)'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 한다. 그것은 '깨달은 콘단냐'라는 뜻이어서 "콘단냐는 깨달았다."고 외친 붓다의 말씀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가를 상상하게 해준다. 이윽고 나머지 네 명의 비구들도 마침내 붓다의 설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때 이 세상에는 여섯 분의 성자가 계셨다. 고 경전은 말하고 있다. 또 그때 십 천세계(十千世界 ; 매우 광활한 세계라는 뜻.)가 진동했으며 무한한 광명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대사(大事)의 성취를 표현하는 고대적인 수법이거니와, 그 대사가 바로 불교의 성립을 뜻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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